설악산 종주, 26km 15시간

(수필) 백담사에서 비선대까지

by 불씨

자연이 선사한 선물

지난 여름 어느날 , 비가 지나가는 중이라 산행을 포기해야 하나 고민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기상은 우리에게 평생 잊지 못할 선물을 안겨주었다. 구름바다가 만들어낸 운해의 장관이란! 태풍 특유의 역동적인 기상변화가 설악산을 한 폭의 수묵화로 바꿔놓았다.

GPX 등산로는 총 26킬로미터, 15시간의 대장정이었다. 단순한 등산이 아닌 설악산의 진수를 맛보는 완전체험이 될 예정이었다.


백담사에서 시작된 여정

새벽 일찍 백담사를 출발했다. 만해 한용운이 머물렀던 이곳은 언제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든다. "님의 침묵"을 낳은 그 깊은 사색의 공간에서 우리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

소청대피소까지의 길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태풍이 지나가며 만들어낸 신비로운 분위기가 힘든 걸음을 잊게 했다. 구름이 산봉우리들을 감쌌다 드러냈다 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이 마치 살아있는 그림 같았다.


봉정암의 새로운 모습

길 중간에 들른 봉정암은 3년 전 완공된 대웅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전면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진신사리탑이 마치 액자 속 그림처럼 담겨 있었다.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스님들의 정성으로 지어진 이 신성한 공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마음을 정돈했다. 산행의 피로가 불교 건축의 간결한 아름다움 앞에서 씻겨나가는 것 같았다.

이번 산행에서 설악산의 3대 암봉을 모두 만날 수 있었다. 용아장성의 날카로운 바위들이 하늘을 찌르고, 공룡능선의 거대한 암릉이 웅장함을 자랑하며, 울산바위의 둥그런 화강암 덩어리가 포근함을 선사했다.

각각 다른 매력을 가진 이 암봉들이 한데 어우러져 설악산만의 독특한 경관을 만들어낸다. 26킬로미터를 걸으며 이 모든 것을 눈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소청대피소의 장관

1500미터 고지에 자리한 소청대피소에 도착했을 때, 예상보다 깔끔하고 쾌적한 시설이 반겨주었다. 하루 종일 능선을 타며 쌓인 피로를 뒤로하고, 해질 무렵 대피소 앞으로 나서니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탄성이 절로 나왔다.

발아래 구름바다가 출렁이며 계곡을 메우고 있었다. 운해 위로 솟은 봉우리들이 섬처럼 떠 있는 모습은 마치 선계를 보는 듯했다. 태양이 서서히 지평선으로 내려앉기 시작하자 하늘이 붉게 물들며 운해까지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간단한 저녁을 먹으며 바라본 일몰은 그 어떤 호화로운 만찬보다 값졌다. 붉은 노을이 하늘 전체를 수놓으며 활활 타오르는 듯한 장관을 연출했다.


소청대피소의 하루 밤

저녁을 마치자 산속이라 그런지 금세 어둠이 내려앉았다. 소청대피소에서의 하룻밤은 예상보다 춥게 시작되었다. 8월인데도 아침 기온이 14도까지 떨어져 온몸이 오싹했다

오후 아홉시가 되자 취침시간이었다. 담요 두 장이 전부인 잠자리가 마련되었다. 마루바닥 위에 몸을 맡기니 등뼈가 바닥의 결을 하나하나 기억해냈다. 남녀구분 없는 좁은 공간에서 낯선 이들과 어깨를 맞대고 누웠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산이라는 거대한 품 안에서는 모든 경계가 무의미해졌다.

불이 꺼지자 대피소는 고요에 잠겼다. 오직 바람이 지붕을 스치는 소리와 누군가의 코고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딱딱한 바닥이 불편할 줄 알았는데, 자연 속에서 맞는 밤은 달랐다. 하루의 피로가 몸을 무겁게 눌렀고, 의외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문명의 편의를 벗어던지고 오직 몸 하나로 견뎌낸 하룻밤. 새벽이 오기 전까지 꿈도 없이 깊이 잠들었다.


우천으로 바뀐 계획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원래 계획했던 공룡능선은 안전상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웠지만 산에서는 안전이 최우선이다. 대신 천불동 계곡을 통해 하산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 변경된 계획이 오히려 더 큰 선물이 되었다. 천불동 계곡의 진경산수화 같은 풍경은 정말 압권이었다. 비에 젖은 바위들이 더욱 검게 빛나고, 계곡물은 더욱 맑게 흘러내렸다. 마치 정선의 진경산수화 속으로 들어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대포항에서의 마무리

비선대에 도착해 산행을 마친 후, 대포항으로 향했다. 15시간의 긴 여정을 마친 몸에는 시원한 바닷바람이 약이 되었다. 갓 잡아 올린 생선회와 소주 한 잔으로 회포를 푸는 시간이야말로 산행의 진정한 마무리였다.

바다를 바라보며 마신 소주가 이렇게 달콤할 줄이야. 짭조름한 바닷바람과 싱싱한 회, 그리고 산행을 함께한 동료들과의 담소. 이런 것이 진짜 행복이 아닐까.


설악산 종주가 남긴 것들

설악산 종주 26킬로미터는 단순한 거리가 아니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해가 뜨고 지는 동안 설악산의 모든 면모를 경험할 수 있었다. 아침 안개부터 오후 햇살, 그리고 석양까지.

중간중간 힘들 때마다 동료들과 서로 격려하며 걸었던 시간들이 소중했다. 혼자서는 결코 완주할 수 없었을 거대한 도전을 함께 해낸다는 성취감이 컸다.

그 안에는 태풍이 만든 운해, 소청대피소의 추위, 우천으로 인한 계획 변경, 천불동의 진경산수화, 봉정암의 고즈넉함, 3대 암봉의 위용, 그리고 대포항에서의 여유로운 마무리까지 모든 것이 담겨 있었다.

15시간이라는 시간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흘러간 시간이 아니라 설악산과 온몸으로 교감한 소중한 순간들이었다.

앞으로도 이런 도전을 계속하고 싶다. 자연이 주는 예상치 못한 선물들을 받으며, 동료들과 함께 한계를 뛰어넘는 그런 산행을. 설악산이 우리에게 남겨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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