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26 23:23
(어감을 생각하면 채소만능론 또는 채소만능주의가 자연스럽겠지만, 만능 채소라는 표현을 살리고 싶어 접미사를 억지로 끼워 넣었다.) 이팝꽃이 핀 오후, W로컬푸드직매장에 다녀왔다. 집에서 도보 10분 거리인 이곳은 대형마트보다 싱싱한 채소를 취급한다는 장점이 있어 우리 가족이 종종 들르는 곳이다. 오늘도 당근과 쌀과 녹색 음식을 여럿 구매하려 매장을 방문했다. 나는 가격과 신선도를 따지는 엄마를 저 멀리 두고 매장 곳곳을 기웃거렸다. 채소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 나에게 더 흥미로운 것은 단어들이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상큼하고 쌉쌀한 만능채소 깻잎." 나는 깻잎 정도면 만능이라는 수식어를 인정해 줄 수 있겠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머지않아 깻잎 매대 맞은편에서 이런 단어도 발견했다: "영양만점 만능식재료 버섯." 오잉, 얘도 만능이야? 그뿐이 아니었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채소란 채소는 모두 취급하던 그 매장에는 "건강하게 재배한 만능 채소 양배추"와 "부드럽고 고소한 만능채소 애호박"도 있었다. 순간 웃음이 터진 나는 엄마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엄마, 여기 채소들은 다 만능인가 봐."
어렸을 때부터 편식이 심했다. 엄마는 내가 어디가 아프거나 피곤하거나 피부에 뭐가 났다고 투정하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하곤 하셨다. "그거 다 네가 야채를 안 먹어서 그런 거야." 그런 엄마가 W로컬푸드직매장이 제기하는 만능채소론에 의문을 품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그동안의 편식을 반성… 까지는 아니고, 내가 먹을 수 있는 채소를 생각해 보았다. 버섯, 애호박, 콩나물, 숙주나물, 상추, 깻잎, 시금치, 오이, (카레와 김밥 한정) 당근, 고사리, (엄마가 강제할 때) 브로콜리, 김치, 새싹 야채. 온 가족이 머리를 모아도 마땅히 더 찾을 만한 채소가 없었다. 내가 먹을 수 있는 녹색 음식이 이 정도뿐이냐고 닦달을 해 봐도 소용이 없었다.
만능채소론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이 계절에 피는 녹색이 만능임은 분명하다. 내가 모르는 사이 장바구니에는 많은 채소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적당한 산들바람과 흔들리는 나뭇잎 덕분에 걷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문득 콩자반을 먹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먹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엄마는 내가 전에 한 말이 떠올랐다는 듯 작게 웃으며 중얼거리셨다. "콩자반을 먹어야 어른이랬지", 하고. 순간 내 눈이 빛나기 시작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당당하게 말했다. "단지 콩자반이 맛없기 때문만은 아니야. 밥 안에도 콩을 넣을 거면서 왜 또 그걸 반찬으로까지 먹으려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니까. 게다가 어른이 되기 위해 중요한 건, 콩자반을 숟가락으로 퍼먹지 않고 꼭 젓가락으로 집어 먹어야 한다는 점이야. 그냥 먹기만 해서는 안 돼." 나는 언젠가 엄마 등쌀에 못 이겨 억지로 한 알 집어 먹었던 콩자반 맛을 최대한 생생하게 떠올리려 애썼다. 그렇게 못 먹고 뱉을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여하튼 갑자기 용기가 생겼다. 다음에 콩자반이 반찬으로 나오는 식당에 가게 된다면 채소와 당당히 마주하고 주저 없이 도전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