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 of the most sincere forms of respect is actually listening to what another has to say."
- Bryant H. McGill
“가장 진실한 존중의 표현 중 하나는 실제로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며칠 전 직원들과 차 한잔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올해 벌써 4분기입니다. 업무성과에 좀 더 집중해 계획을 잘 세워 주세요”, “그런 측면에서, 각자 챙길 업무를 사전에 보고해 주세요.”
그런데 갑자기 부하직원이 “옛! 뭐라고 하셨습니까?”“무슨 일 있습니까?”라는 말에 모두가 멘붕이 왔다.
5분 동안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출 가고 없는 상사에 대한 또다른 이야기이다.
늘 그 상사의 코멘트는 짧았다. 결재건에 대해 보고를 하든, 사적인 일로 대화를 하러 가면, 이야기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 않고 고갤 끄떡이며, 건성으로 “아 넵.. 그러세요”이라는 짧은 답변을 날린다.
더 당황스러운 건 대화 도중에 온 전화를 받아 옆에 사람은 안중에도 없고 이야기를 이어나가는 곤 했다.
사실 마음속에서는 한대 쥐박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았지만, 현실세계의 나는 소심해진다.
동료의 짧은 답변. 좋다고 해야 할까?
부담스러운 결재건이나 복잡한 내용을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짧은 답변으로 결재가 이루어진다면...
정말 좋은 소통일까? 결재의 목적이 이루어졌으니 룰루랄라?’
편리함+회피성 무책임=파멸?
어디서부터 문제인가?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 6.25 전쟁 등 격동의 시대를 지나면서도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급성장을 했다. 자원이라고 해봐야 인적자원 말고는 없는 나라. 그러다 보니 앞뒤 볼 겨를 없이 열심히, 노력... 성실만이 생존사회에서 살아남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남들보다 일찍, 먼저, 강하게, 더 크게라는 야심 찬 구호들이
치열하게 삶 속에 문신되었고, 경쟁만이 적자생존의 사회에서 승리하는 만렙 전투력을 갖게 된 것이다.
오로지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시급한 과제였다.
“밥은 먹고 다니냐?”“공부는 잘하고 있지?”
참 아이러니 하게도, 아직까지 이런 말이 꽤 친근감 있는 인사말로 사용되고 있고, 공감과 소통을 대변한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나마, 이런 멘트라도 들으면 꽤 관심받고 있고 사회성을 인정 받았다고 생각 할 수 있다.
하지만, 세대에 따라 받아들이는 온도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960년대부터 80년대 산업화를 이끈 아버지 어머니 세대는 “빨리 빨리”를 생존의 전략으로 체득했다. “시간은 돈이다.”, “요점만 말해”, “결론이 뭐야”, 가정과 일 중에서 우선순위는 당연 “일이 먼저다”수직적이고, 가부장적인 조직문화가 지배적인 사회였다. 지시하면 따르는 상명하달식, 질문은 최소화, 보고는 간결하게, 듣는다는 것은 보고를 받는 것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학교교육은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켰다.
인문학적 감성은 대학이라는 거대한 목적지로 가는 길에는 없었고, 오로지 국영수 몰빵.
우리 고등학교에서 몇 명이 어느 대학을 갔는가?는 교사에게는 성과로, 그리고 학교 측에는 명운이 걸린 문제였다.
그래서 오로지 주입식, 암기식 목적지향적 입시위주교육이 최우선 지상과제였다.
교육현장에 인문학은 천시받는 시대였다.
스파르타식 교육으로 좋은 대학 나와 좋은 직장 얻는 것이 가문의 가장 큰 업적이자 미래가 보장되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확실한 성공방법이었다.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사립학교, 교육의 차별성 이면에 더 독하게 각인된 공교육의 붕괴.
교육의 현장에서 감정을 표현하고,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깊은 대화는 어디에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로지 성과위주 입시지옥이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소통과 공감에 대한 과목은 물론이고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심지어 입사하고 나서도 신입사원 커리큘럼은 업무적인 거 이외에는 교육은 없다. 기껏해야 사이버교육이 전부인 상황. 오죽하면 헬조선이라는 신종어가 만들어졌겠는가?
-“그 애기 이미 했는데..” → 상사가 같은 지시를 반복할 때 직원의 속 마음
-“내 의견은 중요하지 않구나” →회의에서 발언이 무시당했다고 느끼는 순간
⇒상사는 지식 전달에만 집중하고, 부하는 피드백받기를 원하는 데 서로 다른 소통을 하고 있다.
-스마트폰 보면 대답하는 부모에게 아이가 느끼는 서운함→“엄마는 내 말 안 들어”
-아이의 이야기는 듣지 않고 결과만 요구할 때→“왜 맨날 잔소리만 하지”
⇒부모는 정보전달과 훈육에 집중하고 아이는 감정과 공감 인정을 원하는 엇갈린 소통을 하고 있다.
-서로 다른 대화를 하고 있다고 느낄 때→“네가 바뀌었어”
- 내용 없는 빈약한 대화만 반복되는 관계에서 나오는 탄식→“우리 예전 같지 않아”
⇒한 사람은 문제해결에 집중하고, 다른 사람은 감정이해를 원하는 소통의 어긋남이다.
3초면 끝나는 답변, 상대방 말 끊기
우리는 왜? 이렇게 서로의 마음에 귀 기울이지 못하게 될까?
연구에 따르면 현대인은 하루 7시간을 듣기에 사용하는데, 이는 깨어있는 시간의 45%에 해당한다. 그중 약 9%는 쓰기, 16%는 앍기, 30%는 말하기이다.
하지만, 충격적인 진실은 실제 이해도를 측정해 보니, 오디오 정보 이해도가 55%, 기억에 남는 것은 단 20%다. 또한 평균 주의력 지속력은 겨우 8.25초다. 얼마나 바쁜지 하루 다른 일로 정신이 팔리는 횟수는 566번이나 된다.
우리는 정보전달은 잘 하지만, 마음 전달은 서툴다.
말하기 기술은 늘었지만, 듣기 능력은 호모사피엔스 시대보다 퇴화했다.
결과적으로, 모든 관계에서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A는 A방식으로 소통하고, B는 B의 방식으로 소통을 하면서, B가 원하는 소통만을 기대하고 있다.
이는 마치 서로 다른 주파수로 대화하는 식이다. 소통이 불통이 되는 것이다.
1. 상대방이 말하는 중에 이미 답변을 준비한다.
2."그런데 말이야”로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꾼다.
3. 상대방 고민에 “그러면 이렇게 해봐라”라고 조언한다.
4. 비슷한 내 경험담으로 대화를 가져간다.
5. 상대방 말이 끝나기 전에 끼어든다.
3개 이상이면 듣기보다 말하기 중독이다.
듣기 80%, 말하기 20%
•그러면 이렇게 해봐 / 내 생각에는 / 예전에 나도 / 그런데 말이야
•정말 힘들었겠다. / 어떤 부분이 가장 어려웠어?/내가 제대로 이해한 게 맞나?
3초 멈춤, 상대방 말끝 나고 3초간 기다리기, 3번 끄덕임, 3가지 확인(사실, 감정, 니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