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의 허브 이야기
산초는 향신료이자 약초, 그리고 오래된 생활 지혜를 간직한 토종 허브이다. 여름빛이 짙어질 때 산비탈에서 익어 가는 산초 열매는 작고 수수하지만, 그 안에 담긴 향은 생각보다 깊고 따뜻하다. 많은 이들이 산초를 요리의 부재료 정도로만 여기지만, 이 작은 열매는 오래도록 사람들의 속을 데우고 기운을 바로 세워주는 역할을 해왔다.
◆ 일상과 신앙의 사이에서 쓰인 향
스님들은 산초를 ‘몸을 은근하게 덥혀주는 풀’이라고 말씀해 왔다. 오신채를 사용하지 않는 사찰 음식에서는, 냄새 없이 음식의 균형을 잡아주는 재료가 더욱 귀하다.
산초는 그 빈자리를 자연스럽게 메우며 산중의 밥상에서 조용하지만 확실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차가운 산나물이나 버섯 요리에 산초 장아찌 한 알이 더해지면 음식 전체의 온도가 달라지고, 속이 부드럽게 열리는 듯한 따뜻함이 퍼진다.
산초가 가진 따뜻한 성질은 전통 의학에서도 기록되어 있다. 속이 차서 소화가 더딘 사람, 아랫배가 냉해지는 체질, 기운이 아래로 가라앉는 느낌을 받는 이들에게 산초의 향은 몸의 중심을 천천히 데워주는 역할을 한다. 옛 민간에서는 산초 몇 알을 약처럼 달여 마시기도 했지만, 이는 치료 목적의 소량 섭취였을 뿐, 일상적인 ‘차’와는 거리가 있었다. 산초의 쓰임은 언제나 향을 조절하고 기운을 바로잡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 익기 전 열매로 담그는 산초 장아찌
산초는 완전히 붉게 익기 전, 연둣빛과 초록의 사이에 머물 때 수확해 장아찌로 담가야 향이 가장 깊다. 이 시기의 산초는 매운 기운이 덜하고, 씹을수록 고소하고 은근한 기름향이 올라온다. 산골에서 오래 생활한 이들은 이 적기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스님들이 산초 장아찌를 특히 귀하게 여긴 것도, 이 ‘익기 전의 향’이 음식의 흐름을 정리하는 데 탁월하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도 몇 해 전에 직접 담가 둔 산초 장아찌가 아직 남아 있다. 오래 숙성된 장아찌는 시간이 지날수록 향이 더욱 깊어지고, 한 알만 더해도 음식 전체의 온도가 안정되는 느낌이 든다. 스님들이 ‘몸을 데워 준다’고 하시던 말씀이 세월이 지나며 더욱 선명하게 와닿는다. 장을 열어 꺼낸 작은 열매 하나가, 바쁜 일상 속에서 잔잔한 온기를 다시 느끼게 해줄 때가 있다.
◆ 향신료이자 약초, 그리고 삶의 온도
산초는 기름진 음식의 무게를 잡아주는 향신료로도 훌륭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오래도록 잊고 있던 ‘향의 지혜’이다. 스쳐 지나가는 작은 향에도 몸과 마음의 균형이 달라지는 순간이 있다. 산초는 그 미묘한 변화를 가장 섬세하게 보여주는 식물이다.
산초를 통해 우리는 오래된 향과 생활의 기억, 그리고 자연의 온도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토종 허브의 풍경 속에는 여전히 배울 것이 많으며, 우리의 삶을 다시 데워줄 작은 향이 숨어 있다.
────────────────────────
https://youtu.be/mX1amN86SiE?si=_zKlCZJrILvA_MC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