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裡面의 초원

- 사물들에게 배우는 방식 3 -

by another N

콘크리트 활자의 빌딩들이 빼곡해지고

엑셀의 가로줄이 지평선으로 늘어날 때

내 안의 검은 말이 앞발을 든다


앞면을 덮고 이면으로 가자


하얀 눈 쌓여 탁 트인 초원

과연 말을 달릴만하구나


하얀 초원에 말발굽이 찍히면

잠자던 풀잎이 튀어 오르고

말들이 일으킨 바람에

활자의 마천루와 굳어있던 그래프도 출렁이리라


이윽고,

말語들의 성城에 한사코 닿으면

비로소 마침표 없는 문장의

눈부신 성벽을 보게 되리라




보고서, 기획안, 계약서를 출력해서 들여다본다. 오타, 자간, 장평, 분량, 점점 머리가 무거워진다. 눈이 뻑뻑해지고 뒷목이 뻐근해져 온다. 영혼의 센서가 작동하며 신호를 보낸다. “이제 그만 덮어라.” 순간, 드러나는 순백의 이면, 눈 쌓인 광활한 초원,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인다. 전직 천사*들의 말이 떠오른다. 이것은 허虛와 실失, "비어 있으면 신령스러운 기운이 왕래한다"했겠다. “조밀한 곳은 바람이 통하지 않으나 텅 빈 곳에서는 말을 달릴 수 있다”라고 했겠다. 옳거니, 말을 데려와야겠구나. 말을 타고 달리자. 마구간 문을 열어 말을 고른다. 미묘한 그날의 느낌과 기분에 따라 말을 선택한다. 갈색 말- 연필(B,2B,4B,6B), 검은 말- 플러스 펜(빨강, 파랑), 트라디오 펜(검정, 파랑), 철갑을 두른 말 - 만년필(워터맨, 파버 카스텔, 라미 등), 시원하고 신령스러운 이면의 초원 위를 말이 달린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죽은 나사로도 살렸다는 그 말도 기억난다. 빼곡하고 굳건한 사실과 정보들의 산맥, 앞면에 억눌렸던 나의 영혼, 억압당하던 나의 무의식, 이제, 갇혀 있던 말語들이 말馬을 얻어 달릴 시간이다. 말馬을 달리자 말語들이 지어낸 풍경과 정경이 휙휙 스친다. 잠시라도 풍격風格을 지어낸듯한 자만은 덤으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아하! 알겠다. 이면지에 글을 쓰며 내가 구하고 싶은 건 지구의 환경이 아니라 어쩌면 내 삶의 이면이 아닐까? 그럼, 이렇게 하자. 앞면에서는 밥을 구하고, 이면에서는 정신을 구하자.


* 전직 천사 -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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