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잔상이 머무는 거리

그리고 남겨진 것들

by 홍시언

브릭레인에서 아리를 마지막으로 본 이후, 나는 한동안 아무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아리에게도, 예지에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들 속에서 오히려 많은 것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리의 마지막 말은 머릿속 어딘가에 오래 머물렀다.

“나는 아직도 그때에 묶여 있는 것 같아.”

그 문장은 특정한 상황보다도 감정의 질감으로 남았다.
그녀의 표정, 말의 속도, 바람에 젖은 머리카락까지 한 덩어리가 되어 기억 속에서 다시 떠오르곤 했다.
말하자면, 그녀는 이미 떠났지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사무실에 나가 도면을 정리하고, 창밖의 세인트 폴 대성당을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곳은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나를 둘러싼 공기는 미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커피를 마시고, 퇴근 후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하루하루 속에서
나는 조금씩 자신을 다루는 방식을 바꾸고 있었다.
그건 무언가를 정리한다기보다는, 무게를 조절하는 일에 가까웠다.

어느 오후, 마크가 내 책상 옆에 나타났다.
반쯤 마신 커피 잔을 손에 들고, 그는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Hey, you up for the review tomorrow?”
(내일 리뷰 미팅 준비됐어?)

“Almost. Just brushing up the planting edge.”
(거의. 식재 경계 조금 다듬고 있어.)

그는 도면을 슬쩍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You're teamed with someone you might know. Ari Lee.”
(아리 리랑 팀 짜졌어. 알지?)

나는 펜을 놓고 마크를 바라보았다.
그 이름은 오래된 단어처럼 천천히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는 말을 덧붙였다.

“Tate's project side pulled her in as a narrative artist. They want emotional context in the planting. Her name came up.”
(테이트 쪽에서 감성적 내러티브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녀를 불렀대. 리스트에 있었고, 그녀가 수락했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우연이라기엔 너무 의도적이고, 운명이라기엔 너무 현실적인 결정이었다.
아무튼 그녀가 내 프로젝트에 합류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며칠 뒤, 테이트 모던 뒤편의 야외 부지.
지난 몇 주 사이 이곳에도 작은 변화가 있었다.
벗겨진 벽면, 젖은 잔디, 바람에 눕는 조형물들.
도시의 결은 늘 그렇게 조용히 스며들었다.
나는 한참을 기다리다, 그녀가 걸어오는 걸 보았다.

아리는 검은 터틀넥 위에 낡은 바버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표정은 조용했지만 눈빛엔 이전보다 조금 더 단단한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오랜만이야, 오빠.”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사이의 시간을 말로 채우는 일은 의미 없어 보였다.

"그러게."

우리는 부지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는 준비해 온 도면을 펼쳐 내게 건넸다.

“이쪽 라인, 더 열고 싶어. 관람자 시선이 벽 쪽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그림자 때문에?”

“응. 여기 벽면에 움직이는 사람의 그림자가 비칠 거야. 말 대신 감정이 드러나는 구조.
사람은 언제나 빛보다는 그림자에 더 오래 남거든.”

그녀의 말은 늘 절제돼 있었고,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걸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가 도면을 접으며 내게 말했다.

“오빠, 오늘 그냥 가지 말고… 잠깐만 걸을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요일 저녁, 도시의 리듬은 조금 풀린 듯 느슨했고,
우리는 아무런 말 없이 테이트 모던을 나와 강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녁이 깔리면서 바람은 제법 차가웠지만, 걸을 만했다.
사람들은 각자의 저녁을 향해 걷고 있었고, 우리는 그 흐름에서 약간 비껴 난 속도로 걷고 있었다.

강 위엔 엷은 안개가 내려앉고, 조명은 말없이 강물에 번졌다.
나는 그 흐름에 조용히 섞이고 싶었다.
말이 없어야만 닿을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지금이 그랬다.

“요즘엔 이상하게, 이렇게 걷는 것도 좀 낯설어.”
그녀가 말했다.
“그냥 걸을 일이 거의 없었거든. 누군가랑.”

나는 가볍게 웃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혼자 걸을 땐 그냥 빨리 걷게 되더라고.”

그녀는 내 얼굴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오빠는 항상 혼자서 걷는 사람 같았어.
누가 옆에 있어도, 마음은 따로.”

나는 무심코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 말에 화가 난 건 아니었지만, 어딘가 시린 구석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그녀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고, 나는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우리는 블랙프라이어스 다리를 향해 걷다가, 강변 근처의 벤치에 앉은 가족을 마주쳤다.
젊은 부부와, 그들 품에 안긴 작은 아기.
아기의 손은 유난히 작았고, 어머니는 아이의 손끝을 조심스레 덮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지만, 눈길이 그 장면에 머물렀다.
그건 어떤 이상이거나 꿈이 아니었다.
그저… 우리가 걸어오지 않은 길,
한 번도 손 내밀지 않았던 방향 같았다.

“저런 모습 보면 무슨 생각 들어?”
내가 물었다.

아리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좋겠다, 싶지.
한 사람에게 그렇게 다 맡길 수 있다는 거.
자기 몸도, 시간도, 미래도.”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가만히 강을 보고 있었다.

나는 마침내, 그동안 미뤄두었던 말을 꺼냈다.
아주 조용히.
마치 혼잣말처럼.

“난 그동안... 너무 조심했어.
네가 나한테서 멀어질까 봐, 말 한마디에도 숨을 죽였고…
그러다 보니까, 결국 말하지 않은 게 더 상처가 되더라.”

아리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때 널 붙잡지 않았던 것도,
내가 원해서라기보단,
그저 너의 무게를 받아낼 자신이 없어서였어.
그게 진심이었는지 아닌지는 이제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그 마음을 계속 안고 살아왔어.”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결국, 감정을 조심하다가 잃는 것 같아.
나는... 조심하다가 너를 잃었고.”

바람이 세게 불었다.
그 말 뒤에 침묵이 길게 이어졌지만,
나는 그 침묵이 싫지 않았다.
그건 무언가가 마침내 말해졌다는 종류의 고요였다.

“오빠.”

그녀가 불렀다.
나는 그 단어 하나에 잠시 숨을 멈췄다.
그 목소리는 예전과 같았고, 그만큼 낯설었다.

“가끔 그런 생각 들어.
그때 우리가, 조금만 더 솔직했으면 어땠을까.
조금만 더 같이 걸었더라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우린 지금 걷고 있잖아.”

그녀는 작게 웃었고, 우리는 말없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의 금요일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그날, 무엇도 확신하지 않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느꼈다.
그녀는 여전히 내 안 어딘가에 있고,
나는 아직, 그 감정을 완전히 놓지 않았다는 것.
아무 말 없이 걸을 수 있는 사람이란,
결국 가장 깊은 곳까지 닿았던 사람이란 걸.

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럴수록 다른 한 사람의 말투와 목소리가 자꾸 떠올랐다.
그건 아직 끝나지 않은 감정의 회전처럼, 내 안에서 조용히 돌고 있었다.

그날 밤, 북런던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
창밖의 불빛은 도로를 따라 미끄러졌고, 바람은 유리창을 타고 낮게 울렸다.
나는 M6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고, 셔터는 눌리지 않은 채 조용히 존재만 하고 있었다.

그녀를 찍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래 남았다.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더 오래 기억될 것 같은 예감.
아니, 어쩌면 그 순간을 나 혼자 간직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눈빛, 말의 리듬, 걷는 속도까지—
모두 셔터 없이 나의 감각에 새겨진 기록이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방 안은 조용했다.
불은 꺼져 있었고, 환기는 멈춘 공기처럼 고요했다.
나는 코트를 벗지 않고 카메라를 책상 위에 내려두었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레 셔터를 한 번 눌렀다.
무언가를 찍기 위함이 아니라, 하루를 정리하는 의식처럼.

그때, 휴대폰이 조용히 진동했다.
잠긴 화면 위로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예지였다.

> “오빠, 잘 지내?
나 이번에 다시 영국으로 출장 가게 됐어.
주말에 이틀 비는데…
그때 오빠랑 같이 가보고 싶은 데가 있어.
혹시 시간 괜찮아?”



나는 한참 동안 화면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답장을 썼다.

“그래, 시간 맞춰볼게.”

말은 짧았고, 감정은 담기지 않았다.
그저 ‘그래’라는 말 안에,
판단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남겨진 여백만이 들어 있었다.

나는 다시 셔터를 눌렀다.
이번에는 창밖을 향해.
고양이 한 마리가 쓰레기통 근처를 서성이고 있었고,
그 너머로 길고 조용한 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속에 내가 있었고, 그 순간이 전부라고 믿고 있었다는 걸.
지나고 나서야,
조용했던 말들,
무심히 지나친 손끝,
스쳐갔던 시선들이
결국 다, 마음속 어딘가에 가라앉아 있던 조각들이었다.

감정은 그렇게 멀어진 뒤에야 제 모양을 드러낸다.
누구의 것이었는지도 모르게 서로 섞여 있었고,
누가 먼저였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그 밤에 조용히 서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과,
이름 붙일 수 없는 여운 사이에서.
붙잡지 않았던 말들,
다시 꺼낼 수 없는 마음들이
여전히 내 안 어딘가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그 밤의 냄새와 함께 조용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토, 일 연재
이전 04화Chapter 4. Unsent Le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