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Unsent Letter

그림자 아래 놓인 말들

by 홍시언

브라이튼에서 돌아온 다음 날, 나는 북런던의 낡은 아파트에서 늦은 아침을 맞았다. 침대 위에는 절벽 아래에서 나눈 말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예지가 조용히 내 옆에 앉아 있던 순간, 바람의 방향,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바라보던 눈빛. 그것들은 가방 속이 아니라 내 머릿속에 담겨, 지금 이 방 안 어딘가에서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예지가 꺼내지 못했던 편지를 떠올렸다. 무릎 위에 올려두고도 읽지 못한, 오래된 말들. 그녀의 마음속 어딘가에 접힌 채 남아 있는 그 말들은, 내 안에서도 완전히 펼쳐지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커튼을 젖히고 바라본 창밖. 템스 강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 겨울의 잔향을 품고 있었고, 거리의 사람들은 각자의 봄을 향해 걷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는 다른 계절 속에 있는 듯했다.

회사로 향하는 길, 세인트 폴 대성당 앞을 지났다. 책상에 앉아 식재 도면을 정리하면서도 마음은 아직 해안선을 배회하고 있었다.

“Hey Hong, you alright?” (홍, 괜찮아?)

“Yeah. Just a bit of Brighton still in me.” (응, 아직 브라이튼이 좀 남아 있는 기분이야.)

“That right? You’ve been looking at your screen like you’re waiting for the tide to come in.” (그래? 화면을 마치 밀물 기다리듯 멍하니 쳐다보고 있더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크는 커피를 마시며 말을 이었다.

“It a girl thing?” (여자 문제야?)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You don’t say much, do you? Very Korean.” (넌 참 말이 없지. 아주 코리안 스타일이야.)

그는 웃었다. 컵을 내려놓고 고개를 저으며 덧붙였다.

“Tell you what, Spurs lost again last night. Bloody hopeless. Still, went down the pub and had a cheeky pint. That fixes most things, innit?” (스퍼스 또 졌다니까. 진짜 답 없지. 그래도 펍 가서 맥주 한 잔 하니까 다 괜찮더라. 안 그래?)

나는 웃지 않았고, 마크는 눈썹을 들며 물었다.

“You don’t watch footie, do you?” (너 축구 안 보지?)

“Not really.” (전혀 몰라.)

“Thought so. That explains a lot.” (그럴 줄 알았어. 이제야 이해가 되네.)

그는 다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가, 조용히 내게 물었다.

“So… is she someone new, or someone who never quite left?” (그래서… 새로 만난 사람이야? 아니면 아직 떠나지 않은 옛사람?)

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브라이튼의 바람이 아직 귓가에 남아 있었고, 그녀가 남긴 말들이 문장처럼 떠올랐다. 하지만 그 잔상 위로 겹쳐진 또 다른 얼굴이 있었다.

나는 책상 위의 카메라를 천천히 돌려보았다. 필름 속에는 며칠 전, 브릭레인의 전시회장으로 들어가는 아리의 뒷모습이 담겨 있었다.

브릭레인. 간헐적으로 내리는 비가 골목을 적셨고, 가로등 불빛은 젖은 보도 위로 조용히 번지고 있었다. ‘Gallery M’이라는 철제 표지판이 오래된 벽에 기울어져 있었다. 나는 그 앞에 한참을 서 있다가, 문을 밀고 들어갔다.

갤러리 내부는 숨을 고르는 듯 고요했다. 회색빛 벽에는 흑백 회화들이 걸려 있었고, 전시 공간 전체에 절제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림들에는 사람이 등장하지 않았다. 텅 빈 거실, 식지 않은 찻잔, 창틀에 비스듬히 놓인 조화 한 송이. 모든 장면이 정지된 시간 속에서 관람자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작품마다 머물러 서서, 그 고요 속의 감정을 들여다보았다. 부재는 장면이 아니라 상태처럼 느껴졌고, 침묵은 의미 없는 공백이 아니라 응축된 시간 같았다.

나는 한 작품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텅 빈 방 안으로 흐릿한 빛이 흘러들고 있었다. 창문은 반쯤 열려 있었고, 바람이 커튼을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바닥엔 찬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고, 식탁 위에는 손대지 않은 머그잔 하나가 놓여 있었다. 마치 누군가 막 자리를 비운 것처럼, 혹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 방은 고요했고, 동시에 무언가 빠져나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왔네, 오빠.”

돌아보니 아리가 서 있었다. 눈빛은 고요했고,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 그림… 파리에서 오빠가 떠난 다음 날 그 방이야. 창문을 열었는데 공기가 너무 조용했어. 원래 그런 방이었나 싶을 정도로.

그냥 그대로 두었어. 정리도 안 하고, 불도 안 켜고.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알았어. 내가 괜찮지 않다는 걸.

그 방에 남아 있던 건 말보다 더 오래가는 것들이었어. 온기 같은 거. 손끝에 스치던 바람 같은 거.”

그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표정은 단정했다. 우리는 더 말하지 않고, 벽의 그림을 바라보았다.


전시가 끝날 무렵, 우리는 함께 갤러리 밖으로 나왔다. 비는 그쳤지만, 골목엔 축축한 정적이 가라앉아 있었다. 가로등 아래에 놓인 벤치 옆, 바닥의 물기는 아직 마르지 않았다. 젖은 보도 위로 희미하게 반사된 불빛이 번지고, 바람엔 은은한 머스크향의 습기가 섞여 있었다.

나는 아리의 옆에 앉아 젖은 돌기둥 아래를 바라보며, 불을 붙였다.

“이번 전시… 부재라는 말로 시작했는데, 그게 점점 내 얘기가 돼버린 것 같았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 속 장면들—비워진 방, 식지 않은 찻잔, 흔들리는 커튼 같은 것들은 모두 말하지 못한 감정의 잔향 같았다.

“누군가가 떠난 자리에 남겨지는 기분이… 늘 나였거든.”

“사실… 오빠가 떠날 때, 나 깨 있었어.”

나는 고개를 돌렸다.

“불 켜진 부엌 불빛이 거실까지 번졌고, 오빠가 조용히 짐 싸는 소리도 들렸어. 난 눈을 감고 있었지만… 전부 다 알고 있었어. 붙잡고 싶었는데, 아무 말도 못 했어. 오빠가 그 공간에 머물면… 언젠가 나를 더 미워하게 될까 봐.”

나는 담담히 말했다. “나도 그랬어. 내 감정이 너를 더 복잡하게 만들까 봐… 아무 말 없이 사라지는 게 더 나은 방식이라고 생각했어.”

아리는 나를 바라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고, 눈앞의 벤치 나무결을 손끝으로 문질렀다.

“그래서일까… 난 오히려 그 정적이 오래 남았던 것 같아. 장면은 멈춰 있지만, 그 안의 감정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이번 전시에선 그런 것들을 담고 싶었어. 말로 설명되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남아 있는 것들.”

“부재라는 건, 어쩌면 끝이 아니라… 어딘가에 남은 감정의 흐름 같아.”

“그래서인지, 오빠가 떠난 그날도… 방 안의 공기 같은 게 아직 내 안에 남아 있었어.”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빠 마음엔…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아.”

나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순간, 그녀가 말한 ‘누군가’라는 단어 위로 세븐 시스터즈 절벽 아래에서 바람을 맞고 있던 예지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녀가 꺼내지 못한 편지. 나 또한 끝내 하지 못한 고백.

그건 어떤 사랑의 형태였다. 부재로 설명될 수밖에 없었던, 하지만 여전히 내 안 어딘가에 남아 흐르고 있는 감정의 그림자.

“근데, 이상하지. 그 마음 안에… 나도 조금은 남아 있는 것 같거든. 그게 그냥… 내가 만든 착각일까?”


나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작고 차가운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손을 빼지 않았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보다 오래 남는 감정이 손끝에서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잠시 후, 아리가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오빠, 나 한 장 찍어줄래?”

그 말은 부탁이 아니라, 마음의 조각 같은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오빠를 붙잡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나를 기억해달라는 조용한 외침.

나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지 않은 채 앉아 있었고, 나는 조용히 카메라를 꺼냈다.

셔터를 누르기 직전, 바람이 살짝 지나갔고 그녀의 머리카락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 장면은 플래시처럼 짧았고, 나는 그 잔상 속에 오래 머물렀다.

토, 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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