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Sisters
그날 이후, 예지와 나는 가끔 함께 걷는 시간을 가졌다. 특별한 약속도, 목적도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발길은 자주 같은 방향을 향했다.
세인트 제임스 스트리트를 걷다가, 혹은 퍼시픽 브레드 앞에서 따뜻한 시나몬 번을 고를 때. 예지는 얇은 코트를 걸친 채, 늘 작은 종이컵을 손에 들고 있었다. 손끝을 따뜻하게 쥐고 있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한기를 품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느 날은 비가 내렸다. 파빌리온 옆의 지붕 아래, 젖은 풀과 흙냄새가 섞인 공기 속에서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벤치 위엔 작은 이끼가 자라 있었고, 나무 기둥에는 오래된 갈라진 페인트 자국이 남아 있었다. 비는 일정한 속도로 떨어졌고, 예지는 손등에 떨어진 한 방울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이 조용한 시간이 그녀에게 어떤 위로가 되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지만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맑은 날이면 우리는 세븐 시스터즈로 향했다. 브라이튼 역에서 출발한 12번 버스는 시골길을 굽이굽이 돌아, 언덕 아래 작고 조용한 마을들을 지나쳤다. 버스 안은 적막했고, 창밖에는 무표정한 들판과 담장을 넘나드는 바람, 그리고 양떼가 있었다. 예지는 멀리 풀을 뜯는 양들을 보며 창문에 이마를 기대었다. “사람보다 저 애들이 더 정직할지도 몰라.” 나는 웃지 않았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너무도 잘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절벽에 닿자, 바다는 망설임 없이 아래로 펼쳐졌다. 우리는 흙먼지 날리는 바람을 뚫고 걷다가, 어느 순간 말을 멈췄다.
양 한 마리가 우리를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돌려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그 모습은 마치 오래된 기억처럼 조용했고, 우리는 그 뒤를 따라가듯 걷고 있었다.
그날, 예지는 입을 열었다. “여기 처음 왔을 땐 혼자였어. 그땐 너무 조용해서, 무서웠어. 내가 내 생각을 다 들을 수 있을 만큼.”
나는 발밑의 자갈을 조용히 밟았다. “조용한 곳일수록, 마음이 더 시끄럽지.”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바람을 등지고 조용히 가방을 열어, 조심스럽게 접힌 종이 하나를 꺼내 무릎 위에 올려두었다.
“그 사람이 죽은 뒤, 어머니가 이걸 주셨어. 입원 중에 남긴 편지래.”
나는 종이를 바라보았다. 펼쳐지지 않은 채, 모서리가 해져 있었다. 그것은 종이가 아니라, 그녀 안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무언가 같았다.
“근데… 아직 못 읽었어. 그 말이 내 안에 뭔가를 묶어버릴까 봐.”
그녀는 손끝으로 종이의 접힌 자국을 천천히 문질렀다. “이상하지? 그 사람은 이제 없는데, 이 종이는 아직도 살아 있는 것 같아.”
나는 그 순간을 오래 응시했다. 어쩌면 그녀는 그 편지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묶여 있었는지도 모른다. 편지는 접혀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펴지지 않은 채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언젠가는 읽게 되겠지. 혼자 있을 때, 겨울이 다 지나고 내가 조금 더 나아졌다고 느낄 수 있을 때. 지금은… 아직은 아니야. 지금은 그냥, 오빠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녀의 말은 나를 향한 것이었지만, 어딘가 그보다 더 멀리 있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사이엔, 묻히지 않은 것들이 있었고 그것들은 아직도 흐릿한 채로 남아 있었다.
우리는 바닷가에 앉아 오래도록 말이 없었다. 그 조용한 공기 속에서, 갈매기가 파도를 스치듯 날아올랐다. 예지는 그 시선을 따라가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 사람은... 내 안에 아주 깊이 살아 있었어. 나도 몰랐을 만큼.”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지금은?”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말했다. “이제는... 조용해. 그 사람이 내 안에 있다는 걸 알지만, 나를 삼키진 않아.”
그녀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오빠는 지금의 나를 사랑해? 아니면, 그때의 예지를 그리워하고 있는 거야?”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라, 말이 무너질까 봐 두려웠다. 그녀도 그걸 기다리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파도는 여전히 같은 리듬으로, 조용히 절벽을 때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그녀의 옆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오래 응시하면, 시선보다 감정이 먼저 흐려지는 순간이 있다. 내가 그녀에게 느끼는 것도 그런 것이었다. 바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사랑. 그 사랑은 닿지 못한 자리에서, 천천히 자라난다. 그리고, 그 자리는 어쩌면 그녀가 아직 벗어나지 못한 자리이기도 했다.
그날 밤, 우리는 피어 근처의 펍 ‘The Walrus’에 들렀다. 축구 중계 소리, 웃음소리, 맥주 잔이 부딪히는 소리들. 모든 게 시끄럽고 낯설었다. 우리는 구석진 자리에서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직도 오프사이드가 뭔지 모르겠어.” 예지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나는 웃었다.
그 작은 웃음은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소음 속에 둘러싸인 두 개의 고요였다.
“오빠는 왜 사진을 찍어?”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나는 맥주잔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기억하려고. 잊지 않으려고. 그런데 이상하게, 찍고 나면 더 희미해질 때가 있어.”
예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기억은 그런 것 같아. 잡으려고 할수록 멀어지고, 가만히 놔두면 어느 날 불쑥 찾아오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지도, 다른 질문을 하지도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의 물잔에 맺힌 물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며, 그 조용한 시간 속에 잠겨 있었다. 그 침묵은 공허하지 않았다. 오히려 무언가를 지켜주는 듯한 울타리처럼 느껴졌다.
펍을 나서자, 젖은 도로에 조명이 흐릿하게 퍼져 있었다. 갈매기 한 마리가 멀리서 울고 있었다.
“이 길, 예전에 혼자 걸었을 땐 너무 길었는데.” 그녀가 말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고, 오래된 피로처럼 조용히 내 손을 감쌌다.
숙소로 돌아온 밤, M6의 셔터를 한 번 눌렀다. 창밖에선 파도가 낮은 소리로 밀려왔다. 필름은 아직 반쯤 남아 있었다. 그건 마치, 우리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이야기 속에 있다는 암시처럼 느껴졌다.
나는 책상 앞에 앉아 필름통을 손에 쥐었다. 아직 현상하지 않은 지난날들이 그 안에 고스란히 감겨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핸드폰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아리였다. “잘 지내? 꿈에 오빠가 나왔어. 다시 런던으로 갈지도 몰라. 전시회 때문에.”
나는 화면을 천천히 꺼두고, 조명을 낮췄다. 벽난로의 열기는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나는 생각했다. 누군가는 떠났고, 누군가는 남았다. 그리고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 여전히 머물러 있었다. 다시 닿을 수 있을까, 아니면 천천히 잊혀질까. 브라이튼의 밤은 그렇게 조용히, 그리고 아주 깊게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