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나는 땡이야

기다림 끝에 피어난 이름

by 홍시언

나는 땡이야.
말은 할 수 없지만, 기억은 할 수 있어.
처음 내 몸에 닿았던 숨결,
처음 느낀 따뜻함,
그리고 아주 오래 뒤에 처음 불린 이름.

세상에 왔을 때 나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어.
어둡고 말랑한 무언가들이 내 주위를 감싸고 있었고,
나는 그들 사이에서 조금씩 숨을 쉬는 법을 배웠지.
배가 고프면 낑낑 울었고, 그러면 언제나 어딘가에서 따뜻한 냄새가 다가왔어.
그 냄새가 품어주는 순간, 세상은 다시 괜찮아졌어.

어쩌면 그게 내가 처음 알게 된 사랑이었을지도 몰라.
말 대신 온기와 냄새로 주고받던 마음.
그건 오래가지 않았어.

형제들이 하나씩 사라졌고,
어느 날부터 익숙했던 품이 더는 돌아오지 않았어.
불 꺼진 밤, 서로에게 등을 기대고 자던 날들.
나는 작은 몸으로 그 공간을 기억하고 있어.

그다음, 나는 박스 안에 담겨 흔들리는 어딘가로 옮겨졌어.
환하고 차가운 곳이었지.
유리로 된 벽 안쪽에서 나는 세상을 처음 봤어.
펫샵이라는 곳. 충무로 어딘가.
내가 있던 곳은 하얗고 말끔했지만,
그 속에선 아무 소리도 내지 말아야 하는 것 같았어.

매일 같은 조명이 켜지고 꺼지고,
사람들은 유리창 너머를 기웃거리다 지나쳤어.
어떤 이들은 나를 바라보다가 웃었고,
어떤 이들은 그냥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어.
나는 그저 조용히 앉아 있었고,
가끔 눈이 마주치면 꼬리를 한두 번 흔들어 보였지.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거든.

어느 날 누군가가 말했다.
“얘 데려갈게요. 내일 다시 올게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그 밤은 다르게 흘렀어.
나는 바닥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상상했지.
낯선 냄새, 낯선 품, 그리고 낯선 이름.

그 사람은 다시 오지 않았어.
그 다음 날도, 그다음 주도.
나는 유리 너머를 더는 바라보지 않게 됐어.
기다리는 건, 아무 소리 없이 마음이 무너지는 일이었거든.

그렇게 여섯 달이 지났어.
강아지로서는 제법 큰 몸이 되었고,
유리 안에서 가장 오래 머문 개가 되었지.
그 누구도 나를 이름으로 부른 적은 없었고,
그냥 “얘”, “강아지” 같은 소리들이 지나갔어.
이름이라는 것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내 것이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
지예가 오기 전까진.

그녀는 천천히 들어왔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눈이 바빴고, 손이 조심스러웠지.
나는 본능처럼 움직였어.
작은 발로 그녀에게 다가갔고,
살짝 신발을 건드렸고,
앞발을 올려 올려다봤어.
그녀는 놀랐고, 그다음에 웃었어.
그 웃음은 무섭지 않았고,
오히려 기다려도 되는 눈빛이었어.

직원이 말했다.
“얘는 오래 있었어요. 진짜 착해요.”
하지만 나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어.
그보다도, 그녀의 손이 내 등을 감쌀 때 느껴지는 감촉이 더 중요했어.
그녀의 품은 따뜻했고,
나는 그 속에 머리를 묻었어.

그녀는 나를 안은 채 말했다.
“동그랗게 생겼다… 너.
이름은… 땡이 어때?”

그때 처음,
나는 세상에 내 자리가 생긴 기분이었어.
땡이라는 이름.
그 말 속에는 소리보다 더 부드러운 무언가가 담겨 있었어.
나는 이유도 모른 채 꼬리를 흔들었고,
그녀의 손에 더 가까이 얼굴을 파묻었어.
그게 내 대답이었어.

그날 나는 땡이가 되었어.
아무도 내게 이름을 주지 않았던 여섯 달 끝에,
처음으로 한 사람이 나를 바라보고, 웃고,
내게 말을 걸어준 순간.

그녀는 내게 처음으로 이름을 준 사람이었고,
나는 처음으로 누군가의 ‘무언가’가 되었어.

나는 땡이야.
세상에서 가장 동그랗게 생긴 강아지.
누군가의 품에서 시작된 이름.
기다림 끝에서 찾아온 따뜻한 소리.

이야기는 이제부터야.
그날부터, 내 안에 세상이 열렸어.
햇살과 바람, 집이라는 말,
그리고 그녀의 웃음이 내 하루가 되었지.

말은 못하지만,
나는 알고 있어.
이름이 있다는 건,
누군가가 나를 기억하고 있다는 거라는 걸.

나는 땡이야.
그녀가 그렇게 불러준 순간부터,
나는 나로 살아가게 되었어.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