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봄봄이의 자리

"내가 여기 있어도 될까?"

by 홍시언

나는 땡이야.
동그랗게 생겼다고 누나가 말해서 그렇게 불리게 되었어.
내가 태어날 때부터 이 이름을 가진 건 아니야.
하지만 누나가 그 이름을 불러줄 때마다
내 마음속 어디선가 조용히 조약돌이 또르르 굴러가.
그래서 난 그 이름이 참 좋아.

지예 누나와 함께 처음 온 집은
낙산공원이 내려다보이는 창신동 언덕 위에 있었어.
바람이 부는 소리가 어딘가 부드러웠고,
이상하게도 낯설지 않았어.
마치 이 동네 공기 속에
나를 기다리던 무언가가 숨어 있었던 것 같았거든.

“여기가 네 집이야, 땡이야.”
누나는 그렇게 말했어.
나는 그 말이 얼마나 따뜻한 건지 몰랐지만,
그때 누나의 목소리를 따라
꼬리가 절로 흔들렸어.
말을 못 해도,
그건 나의 대답이었어.

이 집엔 누나 말고도 네 명이 더 있어.
엄마, 아빠, 형, 그리고 나.

엄마는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엄마 발소리에 귀를 쫑긋 세워.
“땡이야, 밥 먹자.”
엄마가 내 밥그릇을 채워줄 때,
밥보다 더 좋은 건 그 목소리야.
엄마 손은 바쁘지만,
내 머리를 쓰다듬을 때만큼은 언제나 천천히 움직여.

형은 아직 나랑 서먹해.
가끔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지만,
곧 핸드폰 속으로 들어가버려.
그래도 괜찮아.
나는 형 옆에 조용히 앉아 있는 걸 좋아하거든.
형은 아직 나를 몰라도,
나는 형을 점점 더 잘 알아가고 있어.

그리고 아빠.
아빠는 내가 집에서 두 번째로 좋아하는 사람이야.
(첫 번째는 물론 누나지!)
아빠는 새벽같이 나갔다가
점심쯤 살짝 집에 들어오셔.
항상 피곤한 얼굴로 방에 누워계시지만
나는 아빠 발밑에 가만히 누워.
그냥 그 옆에 있기만 해도
아빠가 나를 좋아하는 게 느껴지거든.

근데 아빠는 저녁에 진짜 멋있어져.
현관문에서 쨍그랑쨍그랑 유리병 소리가 나면
나는 벌써 꼬리를 흔들 준비를 해.
그건 아빠가 ‘술’이라는 걸 사 오셨다는 뜻이야.
문이 열리고 아빠가 들어오면
술 냄새와 함께 익숙한 냄새가 퍼져.
그리고 아빠는 꼭 이렇게 불러.

“땡이야~”

그 소리는 낮고, 느리고,
마치 잠에서 막 깨어난 목소리 같아.
그런데도 이상하게
내 귀에는 그 소리가 너무 포근하게 들려.
그래서 난 맨발로 뛰어가 아빠 다리에 얼굴을 비벼.

가끔 아빠는 소파에 앉아 조용히 술을 마셔.
나는 아빠 옆에 웅크려 앉아서
아빠가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을 기다려.
아무 말 없이 그렇게 함께 있는 순간이
나는 참 좋아.

그리고 누나.
누나는 나한테 세상에서 제일 부드러운 사람이야.
누나는 퇴근하고 돌아오면
아무 말도 없이 나를 꼭 안아줘.
그 품은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냄새가 나.
어쩌면 봄냄새일지도 몰라.
아니면 봄봄이 냄새.

누나는 내 귀를 만지면서 자주 말해.
“봄봄이 귀도 이렇게 예뻤는데…”

나는 봄봄이를 알지 못하지만
누나의 목소리에서
그 강아지가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알 수 있어.

어느 날 누나는 내 옆에 앉아서
조용히 한 장의 사진을 보여줬어.
사진 속엔 나보다 훨씬 크고
눈빛이 깊은 흰 털 강아지가 있었어.

“얘는 봄봄이야.
우리 집에서 태어나서 자랐는데,
너무 커져서 충북 음성 외삼촌 댁에 보냈어.
그런데… 어느 날 없어졌어.”

누나는 그 말을 하고 잠깐 말을 멈췄어.
나는 조용히 누나의 무릎에 앞발을 얹었어.
그러자 누나는 나를 꼭 안았어.
아무 말도 없었지만
그 품속엔 마음이 담겨 있었어.

“엄마가 그러셨어.
봄봄이 대신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다른 아이를 키워보자고.
그래서… 너를 데려온 거야, 땡이야.”

나는 봄봄이를 대신할 수는 없어.
그치만 누나의 빈자리에
작은 온기를 하나씩 채울 수는 있어.
내가 꼬리를 흔들 때,
누나가 웃는 걸 봤거든.
그리고 그 웃음은
내가 이 집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되었어.

밤이 되면,
누나는 잠이 들고
나는 누나 발밑에 조용히 누워.
누나가 꿈을 꾸는 동안
나는 아주 작게 숨을 쉬어.
그 숨소리가 누나 꿈을 포근하게 감싸주길 바라면서.

나는 땡이야.
누나 품에 들어온
작고 동그란 이름 하나.
봄봄이가 남기고 간 자리에
조용히 피어난 작은 생명이야.

그리고 나는,
이 집의 강아지야.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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