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하지 않게 해주기'가 아닌 '고독을 이겨낼 힘을 만들어주기'
넛지의 먹이가 되는 현대인의 '고독'이라는 취약점과,
이로 인해 경계해야 할 인간의 인지 방식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글은 아래 발제문에 대해 25.01.31 독서모임에서 나눈 대화를 기록한 두번째 대화편임을 밝힙니다.
(대화편은 총 3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소비자와 생산자로서의 넛지 (1), 발제문 읽어보기
소비자와 생산자로서의 넛지 (2), 첫번째 대화편 읽어보기
소비자와 생산자로서의 넛지 (3), 두번째 대화편 (now)
소비자와 생산자로서의 넛지 (4), 마지막 대화편 읽어보기
엠킴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면, 한병철 작가 책에서 ‘호모 디기탈리스’라는 표현이 나와요.
손가락으로 위아래 스크롤만 하는 인간을 이야기하는 건데요. 우리는 지금 능동성을 상실한 사회다-가 작가가 이야기하는 주제예요. 능동적으로 정보를 찾아보는 사회가 아니라, 이렇게 쓱쓱 넘기듯이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용하는 사회가 어느 정도 됐다는거죠.
그리고 정보가 너무 많잖아요. 여기서 작가가 신뢰에 대한 되게 신박한 정의를 말하는데요. 제가 푸밍이랑 신뢰 관계에 있다는건, 푸밍이 제게 모든 걸 공개하지 않더라도 푸밍을 믿을 수 있다는 거죠. 드러나지 않은 정보가 있더라도 그 사람을 전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을 한병철 작가는 신뢰라고 정의해요.
그런데 이렇게 정보가 넘쳐저는 사회에서는 신뢰 관계 자체가 성립을 할 수가 없대요. 드러나지 않은 정보가 없으니까 상대방도 그냥 하나의 정보가 돼버려서 누군가를 신뢰하는 게 아닌 거예요.
이렇게 신뢰라는 게 성립할 수 없는 사회니까, 그냥 정보를 찍어내듯이 기계처럼 모든 게 다 똑같아져서 사회 자체가 되게 기형적으로 된다고 설명하더라고요. 그래서 전 신뢰 관계가 무너지는 것과 정보의 투명성이 관련된다는 게 신기했어요.
이 사태에 조금 더해보자면, 정보가 무분별하게 쏟아져 나오고 손가락으로 쓱쓱쓱 넘기면서 정보를 접하다 보니까 저는 모든 정보를 못 믿겠는 지경까지 간 것 같거든요. 어떤 언론과도 신뢰 관계를 형성할 수 없는 상태까지 된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점점 더 정치적인 무관심도 더 커져 나가는 것 같고, 회피 성향도 생기는 것 같고, 또 뭐가 맞는지 뭐가 틀리는지도 잘 모르는 혼란을 초래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들어요.
오즈 굉장히 인상 깊은 이야기네요. 전 최근에 PO Chapter에서 AGI 얘기를 했는데요.
엠킴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오즈 전문가가 계시니까 마음이 편하네요.
푸밍 제너럴이 어떤 의미죠?
엠킴 그러니까 Artificial Intelligence가 한 단계 위라고 생각하면 되는데요. 쉽게 알파고를 예를 들자면 바둑만 할 줄 알잖아요. AGI는 태스크에 상관없이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다는 제너럴한 의미예요. 그래서 다양한 곳에 적용해도 전혀 성능이 떨어지지 않는거죠.
오즈 AGI와 그냥 AI의 차이를 '능동성이 존재하는가'의 관점으로도 정의할 수 있다더라고요. AGI의 개념 자체는 모호하고 각자의 정의는 다르지만, 제 생각엔 가장 경계할 만한 지점이 이 능동성에 관한 것이었어요.
일단 그 발화의 배경을 조금만 더 설명하면, 저는 최근 제 역량 강화를 위해 AI를 제 개인 직원처럼 다루고 있는데요. 하지만 이 관점은 AGI, 그러니까 AI가 능동성을 가지게 되는 순간부터 흔들릴테니 그 때에는 AGI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의 고민을 꺼냈어요.
그때 나왔던 되게 인상적인 이야기가, 결국 AI가 아무리 고도화가 되더라도 AI는 책임을 질 수 없다-는 이야기를 어떤 분이 하시더라고요. 결국에는 책임 주체로서 AI가 기능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역할은 반드시 필요하며, 그렇다면 그 AGI 시대에서 살아남는 인간은 책임을 질 자격이 있는 사람들일 뿐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나왔어요.
근데 방금 이 이야기가 민서가 해준 이야기랑 싱크가 맞았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고 있다고 했잖아요. 그건 사람들이 너무 수동적으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기 때문이겠죠. 또 사람들이 수동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이유는, 사람이 쉬운 선택들만 해도 괜찮은 세상이 만들어졌기 때문인 것 같네요.
엠킴 맞아.
오즈 그럼 이건 곧 너무 많은 선택 설계자들이 인간에게 넛지를 많이 해서, 좋은 넛지든 나쁜 넛지든 간에. 쉬운 선택만 해도 괜찮은 사회가 됐고, 사람들은 수동적이게 됐다고 해석이 되네요. 정보를 너무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게 됐으니까 그 무차별적으로 수용하게 된 인간이 책임을 질 마음도 없고 책임을 질 자격도 없어져서 지금 이 사회에 혼란이 가득해진 게 아닌가 싶어요.
엠킴 그것도 흥미롭네요.
오즈 그래서 이 관점에서, 그러면 AGI가 상용화되었을 때 저는 정보를 무차별적으로 수용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고,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사실은 사람들에게 이제는 약간의 불편함을 줘도 되는 시대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드네요. 이런 관점에서의 넛지를 더 많이 해야 되지 않을까? 싶고요.
엠킴 뭔가 불편함을 주는 느낌
오즈 금융상품 가입할 때 읽었습니다, 읽었습니다, 읽었습니다... 하고 일일이 체크하게 하는 넛지도 불편함의 일종이라고 생각해요. 아무튼 그런 생각이 좀 드네요.
엠킴 그러게. 근데 사용자의 고민을 최소화해서 선택이 편해지게끔 만든 넛지는 많은데, 사람이 능동적으로 생각과 행동을 하게끔 하는 넛지는 잘 떠오르지가 않네요.
오즈 오히려 완전 반대의 예시는 바로 떠올라요. 인간을 수동적으로 만든다는 건,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다는 거잖아요. 말 그대로 make-it-easy. 넛지의 기본 행동 강령이죠.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인스타그램 스토리랑 쇼츠/릴스(숏폼) 이렇게 두 개라고 보거든요. 인스타그램 스토리는 탭만 하면 넘어가잖아요. 심지어 탭 안 해도 넘어가죠. 빨리 보고 싶으면 넘길 수 있고 가만히 있어도 그냥 넘어가요. 그러면 인간이 그 콘텐츠의 무한 굴레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되는 거죠.
엠킴 되게 수동적으로 만들죠.
오즈 저는 인스타 스토리가 탭, 탭, 탭... 하고 좌우로 넘어가는 포맷에서 릴스 형태의 수직 스크롤로 바뀐 게 지독하다고(positive - 넛지의 효과 관점에서) 생각해요.
엠킴 손가락으로 너무 쉽게 스크롤이 되니까요.
오즈 이렇게 내리는 형식이 모바일 디바이스에 가장 최적화된, 진짜 가장 진화한 타입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그 ‘스토리’라는 포맷보다 스크롤 내리는 게 훨씬 UX적으로 고도화된 느낌이에요. 그래서 숏츠, 릴스가 인간의 수동성을 강화한 UX라는 관점에서 잘 만들었다 싶기도 하고, 약간 좀 착잡하기도 해요.
그래서 오히려 메타가 스레드를 밀고 있는 게 조금 더 긍정적인 방향인 것 같기도 해요.
엠킴 저 스레드 안 써서 잘 모르는데, 인스타그램이랑 어떤 게 달라요?
푸밍 저도 스레드가 아예 없어. 저는 어플을 사용을 해본 적이 없어서요.
엠킴 X 같은 느낌인가요?
오즈 X랑 유사한데, 인스타그램을 계속 내리다 보면 스레드에서 읽어볼 만한 글을 노출해주거든요? 인스타그램이 이미지로 표현하는 거라면, 스레드는 텍스트 기반이죠.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스레드가 인스타그램보다 좀 더 양질의 정보를 생산한다는 차원에서 훨씬 낫다고 느껴요.
엠킴 저는 약간 살짝 다른 결이기는 한데, 지금 스포티파이를 쓰고 있거든요. 원래는 유튜브 뮤직을 썼었어요. 근데 스포티파이의 알고리즘이 유튜브보다 능동성 차원에서 결정적으로 낫다고 느낀 게, 유튜브 알고리즘은 내가 들었던 것만 피드에 띄워줘요.
유튜브 뮤직에는 빠른 선택(Speed Dial), 다시 듣기 기능이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는 제가 자주 재생했던 곡들만 나열돼 있어요. 새 곡이 아예 없거든요. 반면에 스포티파이는 애초에 ‘오늘의 믹스’ 같은 알고리즘 기반의 플레이리스트를 구성을 할 때 내가 한 번도 들어보지 않은 곡들을 훨씬 더 많이 포함시켜요. 그래서 제가 조금 더 음악 감상을 다양하게 할 수 있도록 유도하더라고요. 근데 정확히 같은 똑같은 원리가 쇼츠에도 적용이 되거든요.
가령 유튜브 쇼츠는, 제가 장도연의 살롱 드립을 봤다면 그 다음부터 모든 쇼츠는 다 살롱 드립만 떠요. 끊임없이 장도연 영상만 보는 거예요. 물론 장도연의 팬이긴 하지만… 어쨌든 알고리즘에 갇히게 되는 거죠. 개인적으로 그 알고리즘은 별로인 것 같아요. 제공하는 정보에 새로움이 전혀 없는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요? 에코 체임버의 결정체인 거죠. 그래서 좀 유튜브에 회의감이 많이 들었어요.
오즈 저는 스포티파이의 스마트 셔플 기능이 좋았어요. 내가 들었던 거랑 유사하지만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곡을 플레이리스트 구성에서 세 곡에 한 번 꼴로 포함시켜줘요. 근데 그 곡이 마음에 안 들면 마이너스 버튼을 눌러서 불호를 표시할 수 있거든요. 버튼을 누르면 팝업이 떠서 '이 곡은 다시는 추천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알려주기도 하고요. 저는 그 UX가 좋았어요. 아예 새롭게 정보를 주는데도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네가 선택해-이런 느낌을 주니까요.
엠킴 맞아요, 그런 기능이 있었어요. 저도 그 기능이 좋더라고요. 저는 그런 알고리즘을 구성하는 것도 일종의 넛지라고 보는데, AI 연구자로서 그런 걸 어떻게 고안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오즈 비슷한 결로 애플 뮤직도 그런 기능이 있어요. 매주 애플 뮤직의 큐레이터가 선별한 오늘의 믹스 같은 컨셉으로 플레이리스트를 제공하는 것도 좋았어요. 이런 것도 있고 저런 것도 있어, 계속 똑같은 것만 듣지 마, 이렇게 넛지해주는 느낌이랄까요.
엠킴 맞아요, 저도 그래서 애플뮤직이랑 스포티파이를 유튜브 뮤직보다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이쯤에서 잠깐 멈추고 나눴던 이야기들을 되짚어보면, 다들 새로운 정보에 대한 갈망이 드러저는 에피소드인 것 같아요. 항상 듣는 음악, 똑같은 정보로 구성된 뻔한 알고리즘 말고, 내가 접해보지 않았던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갈망이 조금씩 보이네요.
푸밍 저도 그 알고리즘에 대해서 예전부터 경계를 해왔는데, 현대 사회에 확증 편향이 생긴 사람들이 많아지게 한 것에 SNS가 큰 책임 소재가 있다고 생각을 해요. 현대인들이 그야말로 백지 상태일 때 가장 세뇌당하기 좋잖아요? 자아의 내면에 뿌리가 없으면 너무 흔들리기가 쉬워요. 바로 그 취약함에 의도가 있는 집단이라면, SNS를 이용할 수 있는 거죠.
또 재밌는 게, 내가 조금이라도 어느 한 쪽으로 편향돼 있는 상태일 때 SNS는 이 편향을 해소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강하게 만드는 것 같아요.
그래서 중도가 없어져요. 회색 지대가 없는 거예요. 저는 SNS가 인간의 고독함과 공허함, 특히 혼자 있을 때의 고독함과 공허함을 이용해서 이런 현상을 심화했다고 생각해요.
오즈 그 말 좋다.
엠킴 그러게.
푸밍 이 심리를 정말 잘 파고든 것 같아요. 인스타도 그렇잖아요. 인스타 보면 나 빼고 맨날 다 잘살아ㅋㅋㅋ
또, 조직 자체를 소심한 사람들을 위한 방패, 이런 말로도 표현하잖아요. 인생에 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국가의 노예가 되기 쉽다고 하는 것 처럼, 내가 충성할 것이 생기면 의미가 부여되는 거니까요, 인생은.
엠킴 맞아요. 할 게 없으니까, 내가 집중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계속 뉴스보고, 그러다 가짜 뉴스도 보게 되고 그러잖아요.
푸밍 제가 이전에 기관의 대표로 있을 때에도, 부원 한 명 한 명이 각자의 고유한 책임을 갖는 걸 중요시했어요. 이를테면, 기관의 장인 나보다도 1층 비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있어야 되는 거죠. 조직에 대한 일정한 기여를 할 자격이자 책임을 주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했어요.
다시 우리 이야기로 돌아와서, 중도를 없애고 편향을 극대화하는 넛지들의 기전을 살펴보면, 내가 인간으로서 이 사회에 내가 어떤 책임을 갖고 있는지, 나는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인간인지, 그리고 나의 공허함을 내가 어떤 형태로 채우는지, 이런 질문과 고민들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있을 때, 바로 그곳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것 같아요.
그 와중에 숏폼을 통해서 쉴틈없이 정보가 쏟아져 들어오잖아요. “나도 어딘가 사회에 쓰일 인간이지,”라고 생각하던 와중에 숏폼 컨텐츠가 교묘하게 ‘남들은 모르는데 너만 아는 이야기’ 같은 제목을 달고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거죠. 그런 류의 컨텐츠들이 ‘모든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지만 당신은 이에 대해서 깨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프로파간다를 심는 경우가 많잖아요.
이런 게 다 인간이 결국 사회에서 의미를 갖고 싶어 의미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건드리는 넛지들인 것 같아요.
오즈 방금 푸밍 이야기에서, 고독이라는 게 결국에는 인간이 시간을 이겨낼 힘이 없다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것 같거든요. 시간이라는 게 참 쓸데없이 길 때가 있어요. 그런데 그 ‘시간’에 대해서 비즈니스 차원으로 생각해 보면, 정말 아이러니하죠.
인간은 시간을 견뎌내는 게 너무 고통스러운데, 기업의 입장에서는 인간의 시간을 많이 확보할수록 좋으니까, 인간이 자기의 시간을 견뎌내기 어렵다는 그 문제점이랑 기업이 ‘저는 당신의 시간을 원한다’는 전략이 딱 맞아떨어져 탄생한 게 쇼츠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 프로덕트들이 '고독'을 해결하고 싶어하는 인간들에게 다가가는 전략이 ‘고독하지 않게 해주기’인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 진짜 해결책은 '고독하지 않게 해주기'가 아니라 '고독을 이겨낼 힘을 만들어주기'가 아닐까요?
엠킴 맞아요. 그리고 본인이 고독하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아요. 사실 그런 프로덕트들은 고독하지 않게 해주는 게 아니라 고독한 기분을 없애주는 거잖아요.
오즈 결국 진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죠.
엠킴 며칠 전에 소소하지만 신기한 경험을 했어요. 밤에 잠들기 전에 핸드폰을 보면, 가족들 다 자고 있으니까 소리를 최소화하잖아요? 근데 음원이 코앞에 있으니까 저한테는 제 주변이 사운드로 꽉 채워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죠. 그 순간 이 콘텐츠를 즐기는 사람이 나 혼자뿐이라는 느낌이 사라지더라고요. 숏폼은 더군다나 짧은 간격으로 수많은 컨텐츠를 제공하니까 아예 내가 고독함을 느낄 새가 없어요. 그러고 나서 비로소 화면이 꺼졌을 때 찾아오는 공허함에 못이겨서 결국 또 핸드폰을 켜고 쇼츠를 보게 돼요. 흡사 마약 같은 거죠.
계속 이런 반복적인 굴레에 가두는 것 같은데, 사실은 물리적으로 혼자일 때 고독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고 건강한 감정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것도 되게 중요한 것 같아요. 막말로 나가서 사람이나 만나라, 하고 말해주는 거죠. 그런 넛지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오즈 맞아요. 얼마 전에 지인이 당근이라는 회사가 없어지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을 받았대요. 당시에는 예상 외의 질문이라 저도 답을 모르겠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밖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라”는 관점에서 보면 당근이 되게 좋은 역할을 하고 있네요.
엠킴 코로나 이후로 언택트 사회가 됐잖아요. 사실 우리도 이렇게 만나지 않고도 화상으로 얘기할 수 있고.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하물며 애인 관계에서조차도, 매일 연락이 되는데 매일 데이트를 할 필요는 없잖아요? 친구들도 매일 연락이 되는 친구들이 있고. 그러니까 만날 필요성을 점점 못 느끼는데, 사실은 만나야 하거든요.
물리적으로 만났을 때만 형성되고 지속되는 시너지가 존재해요. 우리야 뭐 서로 실존 인물인 것도 알고 실물로 만난 기간도 길고 지금도 주기적으로 만나지만, 정말 온라인으로만 소통하는 사람한테 친밀감 같은 게 잘 안 느껴지거든요. 그러니까 그 사람을 실제로 만나게 되면 오히려 기분이 이상하단 말이에요. 정말 VR같은 존재인데 실제로 만나면 오히려 혼란스러운 느낌이랄까요? 저는 바로 거기서 고독함이 생겨난다고 봐요. 언택트 사회에서는 실제적인 시너지를 느끼기 어려우니까요. 이 고독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람을 만나는 것밖에 없어요.
바로 그 시넛지의 형성을 당근 같은 앱이 가능하게 해주는 거죠. 하물며 당근을 소개팅, 미팅 앱으로도 겸해서 쓴다잖아요. 당근이 점점 더 만남의 장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점이 좋은 것 같아요.
푸밍 저도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제게 가장 인상 깊게 남았던 부분은 ‘인간의 가장 절박한 욕구는 분리성을 극복하고 고독이라는 감옥에서 벗어저는 것이다’라는 문장이었거든요. 결국 우리의 물음들을 계속 파고들다 보면 결국은 인간에 대한 분석으로 귀결이 돼요. 이런 고민이 반영된 넛지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할 텐데 말이에요.
오즈 맞아요. 지금이 정말 특이점이 오지 않았나 싶은데, 방금 우리 얘기가 결국 “인간은 인간을 만나게 해야 한다”로 귀결이 된 것 같은데, 그 관점에서 당근과 카카오가 대척점에 있다고 느껴요. 당근은 '만나야 한다'고 얘기하는 기업이고 카카오는 '안 만나도 된다'고 얘기하는 기업이잖아요. 그런데 사실 과거에는 사람들이 만나지를 못해서, 만나고 싶으니까 카카오를 쓰게 된 건데, 이제는 카카오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안 만나도 되는 상황이라는 게 아이러니한 것 같아요.
엠킴 게다가 안 만나도 되는 명분을 앱의 기능으로 구현하고 있는 거죠. 이제 안 되는 게 없잖아요? 영상 통화부터 시작해서 ‘선물하기’도 있고… 직접 가서 선물 줄 필요도 없잖아요.
오즈 맞아요 맞아.
엠킴 우체국 가서 선물 포장하고 부치고…
푸밍 우와 옛날에는 문구점에서 (직접) 사서 줬었는데!
엠킴 심지어 포장지도 사서 일일이 테이프 붙여가면서 포장해서 줬는데… 그런데 카카오톡 선물하기에는 심지어 포장 기능도 있어요! 누가 선물을 직접 주냐고요. 심지어 배송도 빠르죠. 다들 “선물하기가 잘 돼 있다”라고 말해요. 선물하는 행위의 정성과 감성 같은 게 없어졌잖아요.
푸밍 내가 책에서 읽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래서 아날로그 넛지라는 게 있더라고요. 오히려 이런 예전 풍습을 의도하는 부분들이 있대요.
푸밍 화제를 전환해서, 저는 넛지가 어떤 매커니즘으로 작동해야 편향된 사람들을 되돌릴 수 있는지가 궁금했거든요. 그러면서 생각 난 에피소드인데, 정신과 폐쇄 병동이 의학과의 실습 필수 코스거든요. 거기에는 스키조프레니아(조현병) 환자들도 많이 있어요. 실습생들이 보통 환자와 대화를 하도록 지시를 받는데요, 가령 환자 중 한 명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죠. ‘어젯밤에 내가 앞에 병원 앞에 산책을 하다가 어떤 사람이 폭탄을 들고 나를 쫓아오더라,’ 이렇게요. 그런데 사실 그 환자는 3주 동안 병동을 나간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이런 환자들을 대할 때 철칙이 있는데, 절대 이 환자가 맞다고 얘기를 해도 안 되고 틀렸다고 얘기를 해도 안 돼요.
대신, 이 사람이 틀렸다는 걸 스스로 깨닫도록 대화로써 유도해야 된대요. 예를 들어 “어제 어디 계셨어요?” ”병실에요.” “밖에 좀 보신 지 오래되지 않았어요?” “어제 눈 왔었는데” “어제 걸을 때 눈이 오셨었나요?” 아닌 것 같아요. “그러면 어제도 여기 계셨던 거네요.” 이렇게 대화를 하면 이 사람이 갑자기 혼란이 온대요.
오즈 신기하네요.
푸밍 이렇게 자신의 기억이 잘못됐다는 걸 깨닫는 게 점점 치료가 되는 과정이래요. 그래서 절대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고 자기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질문들을 계속 해줘야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이번에 『다크넛지』랑 『세뇌의 역사』를 읽으면서 좀 더 사회적인 차원에서 편향된 사람들을 어떻게 일깨우고 궁극적으로 우리가 다시 건강한 사회로 돌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결국은 자기 자신이 답을 찾는 게 제일 큰 열쇠니까, 그런 지점을 고려해서 넛지가 계속 일어났으면 좋겠네요.
오즈 방금 그 치료법 자체가 넛지인데요?
엠킴 그러면 결국 다크 넛지로부터 구제되는 방법은, 결국 본인의 생각이 편향되었을 수 있음을 본인이 자각하는 건데, 그걸 자각하게끔 하는 외부의 넛지가 있어야 된다는 거잖아요. 스스로는 하기가 어렵다고 봐요. 강하게 말하면, 우리 모두는 일종의 다크 넛지가 만든 스키조 환자 아닐까요. 기업이든 콘텐츠 크리에이터든 “깨어 있는” 사람들이 해야 된다는 생각이 드는데, 애초에 “깨어 있는” 사람들이라고 특정 그룹을 정의하는 것 자체도 너무 상대적이고, 스스로 나는 깨어있다-고 주장하는 것도 웃기잖아요? 저는 이 시점에서 비판적 사고의 중요성을 한 번 더 강조하고 싶네요. 저는 “깨어 있음”이 곧 비판적 사고력을 의미한다고 보거든요. 그렇지만 ‘저는 비판적 사고를 할 줄 알아!’라고 자만하는 사람들이 넛지를 하면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이 부분은 아직은 미결인 것 같아요.
푸밍 사회도 아직 답변하지 못한 것 같아요.
오즈 저는 저거 궁금해요. 세뇌!
푸밍 일단은 재밌는 얘기는 아니고 좀 슬픈 얘기를 하자면, Brainwash라는 단어가 한국전쟁에서 유래했다더라고요. 중공군의 포로로 잡혀간 미군들이 풀려날 때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발언들을 완전 막 쏟아냈던 거죠. 미국에서 들어와서 적응을 못한 거예요. 이 상황을 보고 Brainwash라는 단어가 생겼대요. 그래서 한국 전쟁이 이 단어를 쓰게 된 시발점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런 군사들에게 그 사상이 잘못되었음을 알려주는 재교육을 시켰다는 얘기가 『세뇌의 역사』에 나와요.
엠킴 그 책에서는 심문이라고 표현했는데『다크 넛지』에서는 막 스파이를 잡았다거나 이런 경우에 이제 그 사람이 정보를 뱉게 하려고 다양한 방법을 써서 사람을 정신적으로 고통에 몰아넣는 이야기가 나와요. 세뇌랑 비슷한 거죠. 그러니까 현실 상황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혼란스럽게 만들고, 세뇌를 시켜서 결국 정보를 빼내는 이야기예요.
푸밍 맞아요. CIA에서 그런 세뇌 프로토콜도 있대요. 『세뇌의 역사』를 읽으면서 인상깊었던 부분이... 파블로프 실험 아시죠? 파블로프의 연구가 레닌 스탈린 시대 때 그 체제의 정당성을 부여한 측면이 있대요. 그래서 스탈린이 그 연구를 되게 좋아했다고 하더라고요. 인간이 조건에 의해서 반응을 한다는 연구 결과에 되게 만족스러워했대요. 그래서 인간을 그냥 이렇게 딸깍딸깍 하면 되는, 그런 구성 요소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서 영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하여튼 그런 역사가 있었다더라고요.
마지막 대화편은 아래 링크에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소비자와 생산자로서의 넛지 (4), 마지막 대화편 읽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