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을 개봉 첫 날 관람했다.현빈의 안중근,그리고 <내부자들>과 <남산의 부장들>을 만든 우민호 감독의 신작이란 점에서 기대감이 높았다.(*쿠키는 없다)
<하얼빈>은 잘 알려진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허구를 가미한 영화다.안 의사가 독립군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 신아산 전투 승리를 이끌었으나 일본군 장교 모리 다쓰오(박훈)를 풀어줬다가 되려 화를 입는 내용과 우덕순(박정민), 최재형(유재명) 등과 이토 히로부미(릴리 프랭키) 암살을 도모하는 장면 등은 역사에 기반한 사실이다.반면,일본어가 능통한 독립군 김상현(조우진), 중국 마적단을 통해 무기 공급을 돕는 공부인(전여빈)이 거사에 동참하면서 벌어지는 일들은 허구다. 안 의사 일행 중 밀정이 암약한다는 설정이 더해지기도 한다.
스펙터클이 아닌,인간적 고뇌에 방점이 찍힌.
영화는 ' 이토히로부미 척결'이라는 스펙타클에 집중하지 않는다.신파도 없다.'국뽕'도 사절한다.
대신 거사를 앞둔 안 의사의 인간적인 고뇌와 언제 독립이 될지 알수없는 캄캄한 터널같은 현실 속에서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내놓은 이들의 고투에 초점을 맟춘다.
안의사의 고뇌엔 '동양평화론'을 역설했던 평화주의자이자 천주교인으로서의 신앙심과 인간으로서의 분노와 증오심으로 '살인'을 택해야하는 현실사이의 갈등이 내재되어있는 것으로 보인다.이는 김훈의 소설<하얼빈>에서 더욱 잘 묘사되어 있는데,신아산 전투에서 일본군 장교를 죽이지 않는 선택에서도 안의사의 이런 면모가 엿보인다.
장교를 살려준 댓가로 동료들을 잃은 안의사는 절규하는데, 그 울부짖음 속에 그런 고뇌가 저릿하게 전해진다.
'인간'에 방점이 찍힌 만큼 영화는 초반 진흙탕 액션에서 힘을 준 이후 잔잔한 물결처럼 흘러간다.그 물결을 채우는 건 마치 연극의 세트나,고전 명화처럼 공들여찍은 미장센들이다.인물을 비추는 작은 빛과 담배연기의 흩날림조차 계산하고 찍은 듯한 정교함이 지루할 틈없이 화면을 채운다.
영화 중후반 영화는 '밀정'을 색출하는 과정의 서스펜스로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지만,그것 자체가 영화의 톤을 흔들지는 않는다.
'밀정'을 잡아내는 과정과 밀정의 정체는 다소 뻔해서 약간의 실망감을 주는데 ,이는 감독이 밀정의 서스펜스를 '의도적으로' 힘주어 연출하지 않은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보다,나는 밀정 시퀀스의 가장 중요한 장면은 안중근이 누가 밀정인지를 알아내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그 장면에서 안중근의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는 물기를 머금고 흔들리는데,영화는 그의 까만 눈을 오래도록 비춘다.나는 그 장면이야말로 밀정 시퀀스를 가장 돋보이겐 한 장면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 눈동자 클로즈업'이야말로 안중근의 고통과 슬픔,안타까움이 집약된 멋진 장면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광활한 풍경에 담은 독립군들의 외로운 길,그 서정
영화는 몽골,라트비아를 오가며 눈부신 설원과 사막,끝이 보이지 않는 얼음 호수 위에 독립군들을 세워놓는다.누군가는 공부인과 무기를 구하러 가는 씬에서 느닷없이 펼쳐지는 사막의 광활함이 생뚱맞다고 하는데,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독립군들의 외롭고 고단한 여정을 '풍광'으로 설명하려 작정한 영화이기 때문이다.꽁꽁 언 호수위를 기어가다시피 하는 안중근의 고독함,말을 타고 폭약을 구하기 위해 머나먼 사막을 건너는 안중근 일행의 결연함같은 것들은 자연이 주는 가슴 웅장해지는 광활함과 무서울정도의 황량함 속에 더욱 절절하게 다가온다.'산문'이 아닌 '시'처럼 읽히는 이런 장면들은 ,당장의 울컥함이나 뭉클함 대신 느리지만 서정적인 슬픔같은 걸 배어들게 한다.
면밀하지 않은 서사를 상쇄시키는 빛나는 연기
나는 사실 현빈과 이동욱의 독립군이라니...너무 현실감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편견이었다.
<만추>에서처럼 코트가 잘 어울리는 현빈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화려한 비주얼의 한계(?)를 뛰어넘어 고통과 분노와 슬픔,증오,두려움으로 일렁이는 안중근의 얼굴을 훌륭하게 그려낸다.
사실 이 영화의 서사는 아주 면밀하거나 단단하지 않은 단점이 있다.예를 들면 소설 <하얼빈>에선 신문 사진외에 한번도 실제로 이토 히로부미 얼굴을 본 적이 없는 안중근이 '키가 작은 남자'라는 단서만으로 그를 저격하기에,한발 을 쏜 후 계속 연달아 총격을 하는 장면이 묘사 된다.하지만 영화에선 그런 류의 '디테일'이 생략되어있다.
어쨋든 이런 단점을 상쇄시켜주는 것이 현빈의 깊은 연기라고 본다.그의 눈동자가 밀정 시퀀스를 다했듯이.
이동욱과 (-나는 강해보이기만 하던 그가 죽을 때 눈물을 찔끔 흘렸다) 조우진(-나는 그가 스테이크를 우악스럽게 씹을 때 슬펐다),가장 현실적인 독립군처럼 보이는 박정민,전여빈,릴리 프랭키까지 .... 적확한 캐스팅은 신의 한수였다.
하지만, 특별출연한 정우성은 아쉬웠다.그가 등장하는 순간,'혼외자 스캔들'이 떠올라 몰입을 방해했을 뿐 아니라,아무리 마적이라지만 런웨이에나 어울릴 애니멀 롱코트에 곱게 묶은 도령 머리,술에 쩔어있다는 설정인데,술냄새가 전혀 나지 않을 것 같은 겉도는 연기같은 건,눈을 질끈 감게 만들었다.
(역시 마적연기는 <추노>의 성동일님을 따라갈 수 없단 생각 잠깐했다.얼마나 현실적인가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지만 난 이 영화를 무척 좋게 봤다.
영웅은 태어날때부터 영웅이 아니다.우리가 익히 아는 훌륭한 의사 안중근이 아니라,인간적인 고통 속에서도 결국 의로운 일을 택한 서른 초반의 청년 안중근의 진짜 얼굴을 조금이나마 가까이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안중근의 나레이션 또한 좀 직설적이긴 해도,가슴을 울린다.
나는 저 혹한 속에서,총을 들고,가족을 버리고, '까레아 우라!'를 외칠 수 있을까.
깜깜한 어둠 속에서 불을 들 수 있을까.
극장에서 꼭 보시길 바란다.
내맘대로 랭크 : 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