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2018)>년 이후 오랫만에 신작을 내놓은 민규동감독,그리고 베를린 영화제에서 금발머리 휘날리며 한껏 멋쁨을 과시한 이혜영의 만남! 당연히 궁금하여 극장을 찾았다
(제목 '파과'는 흠집난 과일을 뜻한다.나이들어 유통기한이 다한 킬러를 은유한다./다른의미론 여자나이 16세를 의미하는데,16세에 킬러로서 홀로서기를 한 여자를 은유하기도 한다.)
개봉:2025년,4월 30일 (122분)
원작:구병모 소설 <파과>(2018)
감독: 민규동
출연: 이혜영,김성철,김무열,연우진,신시아
<파과>는 한 때 '레전드'라 불리던 노년의 킬러와 그 킬러를 집어삼키려는 젊은 킬러의 대결을 그린 액션영화다.
하지만 이것은 외피일뿐.나는 이 작품에서 '멜로'를 보았다.
과거에 학대받고 버림받은 소녀 '조각'(신시아(이혜영 아역))은 자신의 은인이자 스승인 '류'(김무열) 의 죽음의 순간, '지켜야 할 것을 만들지 말라'는 조언을 듣는다.열여섯살 조각은 류에게 연정을 품었지만,류는 거부했다.
그리고 60대가 되어 '쓸모'를 다한 킬러 조각은 자신을 무조건적으로 도와준 수의사 강선생(연우진) 에게 엇비슷한 마음을 품는다. ( 류와 마찬가지로 강선생 역시 부인을 잃고 자식을 홀로 키우는 상황이다)
그래서 조각은 강선생과 그의 딸을 '지키기 위해' 다시 싸움에 뛰어들게 된다.
여기에 또 다른 남자가 끼어든다.막 떠오른 신예킬러 투우(김성철)다.자세한 건 스포가 될 수 있지만,투우는 어린시절 젊은 여인 조각과 엮여있고 그 상처받은 과거로 인해,그녀를 미칠듯이 죽이고 싶어한다.그 집착은 그녀에 대한 미칠듯한 애정결핍으로부터 기인한다.사실 조각이 '자신을 봐주길' 갈구하지만,조각이 자신을 보는 대신 강선생을 지키기 위해 조직의 타겟이 되자,그는 더욱 폭주하게 된다.
나는 이 영화가 그저 '킬링타임용으로 잘 빠진 액션영화'가 아닌 이런 다른 '정서'를 숨기지 않는 지점이 좋았다.
요즘 나오는 범죄스릴러들이 하나같이 엇비슷한 데 이 영화는 다르기 때문에 반가움이 컸다.베를린 영화제에서 첫 공개 된 후 "잔혹하지만 서정적"이란 평이 납득된다.그런데 거기까지다.
감독은 한 여자와 두 남자 사이의 관계성,그 오묘함을 더 깊게 파고들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느낌이다.
조각이 투우와 대사를 주고받는 장면에서 투우가 의도적으로 조각의 얼굴(혹은 입술)에 가까이 다가서며 성적인 긴장감을 느끼게하는 장면이 있는데,이런 연출은 꽤 의도적이며 설득력이 있다.하지만,조각과 강선생의 관계는 애매하게만 그려져서,처음에 왜 조각이 강선생을 죽이지 않는지 어리둥절함이 꽤 오랫동안 지속된다.
감독은 상업적인 전략을 위해,자신이 원작 소설에서 뽑아낸 엑기스인 멜로적 정서를 적당히 버무리다 만 건 아닌가하는 의구심이 든다. 결국 영화는 액션과/멜로를 줄타기하며,액션영화로서의 큰 재미도,멜로영화로서의 색다른 의미도 놓쳐버리고 만다.
그 뿐 아니라,영화의 전개와 흐름이 많이 진부하고 킬러들의 세상을 그릴때의 스타일리쉬함과 외부의 톤이 많이 튀는 점도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어쨋든,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이자,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하는 힘은 단연코 이혜영이란 배우의 존재감이다.
실제 62세인 이혜영은 마른 몸과 퍼석한 흰머리로 어린시절 버림받고 킬러로 나이든 여성의 서글픔과 두려움,깊은 고독감을 현실감 있게 그린다.
나이 60쯤되면,여성, 특히 여배우에게 요구되는 게 우아함이나 고상함,아니면 국민 엄마,그것도 아니면 국민 이모정도의 타이틀이겠지만 이혜영은 이 모든 걸 거부하고 영화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배우 '이혜영'그 자체로 빛난다.액션도 나쁘지 않았다.남자들의 선굵은 액션과는 다른 ,늙은 여성 킬러의 섬세하고도 정교하며 때론 힘에 부치는 액션은 그녀의 비장의 무기인 '비녀'와 닮아있다.
소설을 각색하면서 민규동 감독은 틸다 스윈튼을 염두에 뒀었고 실제로 봉준호 감독에게 '틸다 스윈튼에게 연락 해줄 수 있냐'고 문의도 했다지만,이혜영의 아우라는 틸다 스윈튼 못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혜영은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외로움과 고독을 표현한 장면이 모두 잘려나가서 아쉬웠다는데 그녀와 함께 디렉터스컷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