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이중성
말은 위로가 되기도, 칼이 되기도...
"쟤 피부 봐, 징그러"
지겹도록 듣던 악의 없는 혐오에 미친 듯 아파했었다. 중증 아토피. 내가 살았던 당시 아토피는 지금처럼 흔한 질환이 아니었다. 더구나 내가 살던 섬은 소록도 인근이라 나병(한샘 병) 환자 취급받기 일쑤였다.
아이들은 그 무서운 순수함으로 약자를 탐색하고 자신들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타깃을 설정한다. 남들과 외모가 달랐던 나는 항상 그 타깃이었다.
그래서 싫었다. 사람이 싫고 학교가 싫고 말이 싫었다. 그런 상처에 찌들어 살던 내가 진짜 자유를 맛봤던 21살.
큰 맘먹고 이틀 전 티켓을 끊어 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계획이며 사전 일정 하나 없는 '도망'에 가까운 첫 해외여행이었다.
혼자 떠났던 여행은 아직도 날 버티게 해주는 추억으로 자리 잡았다.
혼자 라운지 바에서 술을 마실 때 해변에 혼자 앉아 바다를 멍하니 바라볼 때. 여행자의 흥에 취한 몇몇 외국인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고, 중2 실력에 머문 내 짧은 영어로 바디 랭귀지로 그들과 소통했다.
난생처음 민소매에 짧은 치마를 입은 내게 아무도 피부가 왜 그러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들이 본 건 내 눈이었다. 말이 통하지 않았기에 말이 같지 않았기에 서로에게 더 집중하려 눈을 봤던 거겠지?
고양이를 주제로 한 소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지금껏 인간의 언어를 구사한 동물은 불행했다."
물론 지치고 힘들 때 나를 일으켜 주는 것 역시 말이다. "괜찮아, 네가 열심히 해서 힘든 거야.", "남들보다 치열해서... 그러니 쉬어가."
말이란 건... 오묘하다. 말이 통해 아프고 말이 통해 치유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