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계를 위한 삶의 현장에서 생사를 걱정하는 청년 노동자
또 죽었다
김용균. 석자를 기억한다.
또렷하게 기억한다. 청년의 어이없는 죽음에, 청년의 애달픈 죽음에 나 역시 소리 내 울었던 그 날을 기억한다.
왜 우리는 생계를 위해 나선 일터에서 생사를 걱정해야 하는가.
그뿐이 아니었다. 특성화고 출신 청년들이 사망했다는 비보는 끝없이 날아들었다. 오늘자 경향신문 1면에는 1692란 숫자가 실렸다. 2018년 1월부터 2019년 9월까지 일터에서 생을 마감한 이들의 수였다.
퇴근하지 못했다. 라는 그 여섯 글자 때문에 아침부터 눈시울을 붉혔다. 사람 가득한 지하철에서 울컥울컥 올라오는 울음을 참으려 애써야만 했다.
나 역시 기자 생활 중 특성화고 아이들이 제주 생수 공장에서 사망한 기사를 썼고 후속 보도를 준비했다. 왜 죽어야만 했을까? 그 아이의 죽음은 그저 운이 없어서 였을까를 추적하며 기획 기사를 준비했다.
그렇게 현장으로 들어갔다. 특성화고 아이들이 일하는 공장으로. 그곳에서 아이들을 만나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왜 대학이 아니라, 일터를 택했을까. 10명 중 8명은 대학을 갈 상황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조손 가정, 한부모 가정 아이들이 8명이었다. 2명은 공부를 하는 것보다 얼른 경험을 쌓아 기술자가 되고 싶다 재잘거렸다.
8명의 아이들. 생계를 책임지고자, 생계를 책임져야만 해서 일터로 나온 아들이 태반이었다. 인근 특성화 고등학교에 들렀다. 어떤 아이들이 취업을 선택하느냐 물었다.
거진 90%는 집안 환경이 대학을 갈 수 없어 취업을 선택한다 했다. 나머지는 특성화고 전형을 거쳐 대기업 혹은 공기업 입사를 선택하는 아이들이라 했다.
이 세상을 일터에서 등졌던 아이들 대부분은 꽃 같은 나이, 생계를 위해 나섰던 아이들이었다.
그곳에서 생사를 걱정하게 되리라 감히 생각했을까? 썪어 빠진 하청 문화가, 중노동은 저임금 노동자에게 몰아줘야 한다는 그 미친 문화가 아이들을 죽음의 문턱으로 밀어냈다는 걸 알게 됐다.
교육청의 평가 시스템 역시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쉽게 말하면 각 특성화고를 평가하는데 그저 숫자만 본다는 거다. 전기과 아이가 출판사 교정교열로 취업을 하든, 농업과 아이가 생수 공장에 취업을 하든 내막은 상관없이 그저 취업률.
그 기획을 마치고 나서 한동안 마음이 아렸다. 국가란 무엇인가.
이 나라의 희망이라는 청년들이, 혹은 좀 더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가방끈이 짧다는 이유로 생사를 걱정하는 오늘이 과연 정상인가.
그 공장에 대한 노동부의 처벌은 어떠했는가. 노동부는 노동부인가 고용부인가. 노동자를 위해 존재하는 곳인가, 고용인을 위해 존재하는 곳인가.
그 수 많은 물음에 무기력했다. 스크린도어, 제주 공장, 석탄 공장, 현대차 공장...
왜 이 단어가 이리도 아프게 전달되는 오늘을 살아가는가.
청년들이, 노동자가 생계가 아닌 생사를 걱정해야 하는 오늘이 너무 싫다.
빨리 돈을 벌어서 장사를 하고 싶다며 배달 아르바이트를 일찍이 시작했던 내 동생은 오늘도 생사를 걱정하며 도로 위를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