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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영 Jul 25. 2021

귀신이거나 신이거나

비틀린 욕망과 공허한 타자

출처: unsplash


여기 귀신과 같은 사람이 있다. 셜리 잭슨 <힐 하우스의 유령>의 주인공 엘리너다. 엘리너는 어머니를 여의고 언니네 부부와 함께 산다. 하지만 엘리너와 그들은 사이가 좋지 않다. 엘리너의 입장에서 그들은 엘리너의 삶을 야금야금 약탈하면서 억압한다. 엘리너는 자유를 좇아 힐 하우스의 초대에 응한다. 폴터가이스트 현상(물체가 스스로 움직이거나 이유 없는 소음, 악취가 나는 현상)이 일어나는 힐 하우스에서 다른 이들과 당분간 머물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비록 이상한 소리들과 이상한 문구들이 집안을 흔들어 놓기는 하지만 그들이 직접적으로 해를 입는 일은 없다. 유령들이 득실거리지만 유령들은 그들에게 원한이 있거나 악의를 품고 행동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지루한 삶에 조금의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정도로 사건을 일으킨다. 따라서 더 중요하게 여겨져야 할 것은 인간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힐 하우스의 유령들이 아니라 엘리너의 ‘귀신성’이다.


엘리너는 누구에게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다. 언니네 부부는 엘리너를 어린아이 취급하며 교묘하게 깎아내리고, 그녀의 의사결정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표면은 엘리너를 걱정해주는 것이지만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엘리너를 움직이게 하려 한다. 힐 하우스에서 만난 시어도라는 어떤가. 루크에게 호감을 느끼는 엘리너의 감정을 시어도라는 “너는 스스로를 바보로 만들고 있잖아.”, “그가 어떤 놈인지 너도 알잖아.”라는 말로 부정한다. 이 역시 엘리너 고유의 감정을 존중하지 않고 유일한 답이 시어도라 자신에게 있다는 태도다. 엘리너는 친자매처럼 여겼던 시어도라에게도 자신을 온전히 이해받지 못한다.


또한 엘리너가 좋아하는 루크는 엘리너의 마음을 전혀 몰라준 채 자기 연민에 빠져 엄마 없이 자랐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엘리너를 초대한 박사를 포함해 그의 부인,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엘리너의 이름만이 유령들에 의해 반복적으로 적히는데도 아무도 그녀의 불안과 공포를 알아주지 않는다. 엘리너가 스스로 자신의 불안과 두려움을 토로할 때까지도 그들은 엘리너의 공포를 과소평가하거나 엘리너에게서 한 발 물러서 그녀를 관망한다.


박사가 말했다.
"자, 내 말 잘 들어요. 이름이……."
"바로 그거예요. 그건 내 이름을 알아요. 그렇지 않나요? 내 이름을 안다고요."
엘리너가 그를 응시하며 말하자 시어도라가 그녀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만 좀 할래? 우리 중 누구라도 이름이 적힐 수 있었어. 그건 우리 모두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

"아니면 네가 직접 쓴 것인지도 모르고."
시어도라가 또다시 말했다.
여자끼리 싸울 때면 남자는 물러나 구경만 하는 법인지라 박사와 루크는 서로 꼭 붙어 서서 비참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p225~8,  「힐 하우스의 유령」


엘리너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힐 하우스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같이 남아있기를 원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그녀를 붙잡지 않는다. 엘리너는 끊임없이 타자들과 어긋나며 한 번도 자신의 욕망이나 감정을 이해받은 적 없다. 욕망이 이해받은 적 없으니 실현될 리도 없다. 엘리너가 유일하게 실현한 욕망은 언니네 부부의 차를 훔쳐 힐 하우스로 떠나온 것뿐이다.


타자에게 단 한 번도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 사람은 귀신에 가까워진다. 욕망을 분출할 수 없고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도 헷갈리기 시작한다. 감정은 억눌리고 일그러지며 그 감정은 이상한 형태로 발현된다. 히스테리, 수동적 공격성, 지나친 상상, 피해의식, 예측할 수 없는 과도한 행동 등으로. 이성적 사고가 마비되고 오로지 자신의 일그러진 감정과 욕망을 어떻게든 표현하려는 욕구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원한을 품고 죽은 귀신들이 그러하듯. 이쯤 되면 힐 하우스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현상들은 결국 엘리너의 일그러진 내면의 분출처럼 보인다.


출처: unsplash


소설의 마지막 장면. 결국 엘리너는 힐 하우스에 남아있고 싶어 하는 자신을 끝내 떠나보내려는 사람들에게 보란 듯이 나무에 차를 들이받는다. 타자에게 한 번도 자신의 감정과 선택을 이해받지 못한 사람의 피할 수 없는 결말이다.


하지만 나는 가지 않을 거야. 그녀는 깔깔 웃었다. 힐 하우스는 저들처럼 쉽지 않아. 가라고 말하기만 해서는 나를 보낼 수 없어. 힐 하우스가 나를 떠나 보낼 생각이라면 또 몰라도.

p366, 「힐 하우스의 유령」


어떤 이들은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필사적인 노력 없이 자멸을 선택한 엘리너를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엘리너가 십여 년을 병약한 어머니를 홀로 간호했으며, 그에 대한 감정적·물질적 보상이 전혀 없었다는 점, 희망과 기쁨이 없는 일상에서 벗어나 온 곳에서 다시 감정적으로 고립됐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엘리너의 마지막 선택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타자의 환대와 인정 없이 홀로 생생하게 살아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반면, 정유정의 소설 <완전한 행복>에서는 엘리너와 정반대의 인물인 유나가 나온다. 그녀는 신과 같다. 엘리너가 어쩔 수 없이 귀신같은 삶으로 내몰렸다면, 그녀는 자발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신을 자처한다. 유나는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감정을 지나치게 상하게 하는, 그래서 자신의 행복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죽이려 한다. 유나 식의 처형이다. 그녀는 자신의 완벽한 삶에 위배되는 행동을 한 사람들을 완벽한 죄인으로 낙인찍고 가차 없이 처형시킨다.


자신이 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타자를 나와 같은 인간이고, 나와 다를지라도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과연 처형의 목적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유나는 자신의 세상에서 자신이 신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은 그들을 믿고 사랑하고 아껴줬는데 그들은 자신을 언제나 배신한다고 확신한다. 자신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유는 엄마의 지병과 가정 형편 때문이 아니라 자신 대신 자신의 자리를 차지한 언니 때문이라고 믿는다. 유나는 언니에게 자신의 삶을 뺏겼다고 생각하고, 그 무엇도 자신의 손아귀에 들어온 것은 파괴할지언정 놓지 않으려고 한다. 자신의 딸에게는 어김없이 신과 같은 영향력을 행사한다.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말과 뜻대로 아이가 행동하도록 양육한다.


"엄마의 시험이야." 내일 아침까지 이 방에서 나가지 않는다면 너를 용서해줄게."
시험. 용서……. 지유는 혀 밑에 고여든 침을 꿀꺽 삼켰다.

(…)

"만약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용서받지 못해요. 선물도 받을 수 없어요."
대답한 후에야 지유는 깨달았다. 엄마가 화장실에 미리 다녀오라 한 이유가 뭔지.
"용서받지 못한다는 건 무슨 뜻일까?"
'보육원에 가야 해요'라는 끔찍한 답이 떠올랐지만 지유는 말하지 않았다.

(…)

"엄마와 함께 살 수 없어요. 외할머니와도 살 수 없어요."
"맞았어. 자, 이제 다시 물어볼게. 오늘 밤, 방에서 나오지 않을 수 있겠니?"

p474~5, 「완전한 행복」


오백여 쪽의 장대한 이 소설은 유나가 어떻게 신의 행세를 하고 어떤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지 보여주는 데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은 그녀의 행동 양상을 겨우 깨우칠 뿐이지 그녀의 감정이나 심정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정상 범주에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유나에게 타자란 자신을 인정하고 환대해줄 수 있는 이들이 아니라 응당 자신의 완전한 행복을 위해 헌신해야 하는 사람이다. 작가는 유나의 1인칭 시점에서는 한 번도 이야기를 진행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소설 속 다른 인물들과 같이 유나의 행동과 드러난 발화를 통해서만 유나를 표면적으로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한 사람은 귀신처럼 살고 한 사람은 신처럼 산다. 하지만 신처럼 사는 이의 삶이 귀신처럼 사는 삶보다 나을 것은 없다. 신처럼 구는 유나도 결국은 자멸한다. 자신의 범행이 모두 들통났기 때문에 자신에게 놓인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가 추구하는 완전한 행복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신기루다. 삶은 제각기의 개성과 신념을 가진 타인들과 상호작용을 주고받는 역동성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환경은 물론 다른 이의 생각과 욕망까지 통제하려는 유나의 오만함은 필연적으로 불행을 자초한다.


출처: unsplash


정은경 평론가는 자신의 평론집 「길은 뒤에서 온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자아에 대한 확고한 생각, 세상과 타자에 대한 이해, 비록 그것이 오류일지라도 그러한 확신이 없다면 우리는 ‘감정’을, ‘말’과 ‘행동’을 가질 수 없고, 투쟁할 수 없다.” 이 말을 위 두 인물에게 대입해볼 때 엘리너는 자아에 대한 확고한 생각이 없었고 유나에게는 세상과 타자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 엘리너의 자아는 타자에 의해 끊임없이 흔들리고 분열되고 있으며 유나는 비대한 자아로 인해 세상과 타자를 자아에 종속되며 지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의 행동은 언뜻 세상과의 치열한 투쟁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행동’ 없는 자아의 일인극이다. 귀신과 신이 인간들에게 직접적으로 어떤 ‘행동’을 가할 수 없는 것처럼, 인간들이 벌이는 ‘투쟁’에 참여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귀신처럼 사는 것과 신처럼 사는 것의 공통분모는 타자 없음이다. 타자에게 완전히 무시당하거나 타자를 완전히 무시할 때에 우리는 끔찍하게 외로운 귀신이거나 전혀 완벽하지도 행복하지도 않은 신이 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타자와 자아 사이의 줄다리기를 끊임없이 지속해야 한다. 자아의 고유함과 욕망을 직시하되 타자의 고유함과 욕망을 존중하면서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타자에게 무조건적으로 의지할 필요도, 타자를 무조건적으로 배제할 필요도 없다. 줄다리기에 실패할 때 갖게 될 것은 어느새 벼랑 끝에 내몰린 초라한 자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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