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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영 Oct 02. 2021

가능성의 조우

「빌러비드」, 토니 모리슨

출처: unsplash


어떤 기억은 현재와 미래를 지배한다. 그 기억은 물에 젖은 거대한 솜이불이 갓난아이를 짓누르듯 기억의 주체를 압도적으로 포획한다. 기억의 주체는 그 기억을 회피하거나 제거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기억의 주체는 죽을 때까지 혹은 정신을 아예 놓고 다른 자아를 설정할 때까지 그 기억에 포획되어 살아야 할까? 내가 나인 채로, 그 기억과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을까?


「빌러비드」에서 세서는 그 기억의 주체다. 그녀는 자신의 아이들까지 백인들의 노예로 살게 할 수 없어 아이들을 살해하려 시도하거나 살해한다. 두 아들과 뱃속에 있던 아이는 살아남았고, 이제 막 기어 다니기 시작한 딸아이는 죽는다. 세서는 자신과 자식들을 모두 죽임으로써 노예제도에서 해방되는 계획을 갖고 있었지만 이 역시 백인들에 의해 무참히 저지된다. 그리하여 그녀는 그 기억의 주체가 되어 원한과 서러움의 결정체인 딸아이의 영혼이 깃든 집에 살고 있다.


소설의 초반, 죽은 딸아이의 영혼은 유령의 형태로만 존재한다. 식탁을 들썩거리게 하거나 기이한 소리를 낼 수는 있지만 몸과 목소리는 없다. 세서와 그의 살아남은 딸 덴버는 그저 그런 깊은 원한의 표출을 견디되 기억과 마주하지는 않는다. 덴버는 자신의 엄마에게 한 번도 유령의 기원에 대해 물은 적 없으며, 세서는 그 유령에 관한 이야기만 빼고 덴버에게 과거를 들려준다. 


하지만 기억은 당당하게 제 발로 기억의 주체를 찾아온다. 유령으로만 존재하던 그 기억은, 사람의 몸을 입고, ‘빌러비드’라는 이름을 얻어 그들 앞에 나타난다. 이때 빌러비드의 출현 시점은 기억의 필연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스위트홈에서 같이 지냈던 폴 디가 세서를 찾아와 자연스럽게 세서의 집에 머물고, 세서의 남자가 되기로 한 뒤 덴버는 폴 디를 당연하게도 배척한다. 하지만 그들이 처음으로 나란히 나들이를 나선 날, 그들의 그림자가 손을 잡고, 세 사람의 얼굴에 진심 어린 미소가 피었던 날, 그러니까 새로운 출발이랄지 희망찬 미래랄지 하는 관념을 현실로 이룰 수 있을 것만 같았을 때, 그 기억은 몸을 입고 그들 앞에 선다.     


세서는 사람들의 미소에 미소로 응했다. 덴버는 기뻐서 몸을 흔들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제는 앞장서서 가는 세 사람의 그림자는 여전히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빌러비드」, 88p      


그들은 물에 젖은 외딴 흑인 소녀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집으로 데려와 극진히 보살핀다. 얼마 안 가 덴버와 세서는 그 소녀가 세서가 죽인 딸, 빌러비드의 현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앎 이후에는 기억과의 처절한 대면이 시작된다. 어쩌면 그 기억과 전혀 상관없이, 세서로 하여금 새로운 시작을 꿈꿀 수 있게 하는 인물인 폴 디(미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집과 이 기억의 서사에서 쫓겨난다. 세서, 빌러비드 모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그 기억의 중심에서는 타자일 수밖에 없는 덴버(현재)도 그들 근처에서 맴돌 뿐 대면에 낄 수 없다. 오로지 세서와 세서의 거대하고 끔찍한 기억만이 용서와 구원의 과정을 거친다. 빌러비드는 세서가 죽인 자신의 딸의 현신이자 애써 들추지 않았지만 결국은 마주 보아야 했을 과거다.


빌러비드는 세서에게 애착과 애증을 넘어 끊임없는 해명과 죄의식을 요구한다. 세서는 생계도 돌보지 않고 빌러비드에게 응답하는 삶에 매진한다. 덴버와 세서는 나날이 말라가는 반면 빌러비드는 마치 세서의 죄의식을 먹고 자라는 듯 나날이 몸집이 커진다. 


세서는 점점 말이 많아지고 변명도 많아졌다. 자기가 아이들을 위해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고 어떤 일을 겪었는지, 포도 덩굴 정자에서 파리를 쫓아준 일, 달개집까지 기어서 갔던 일을 묘사했다. 어떤 말도 빌러비드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빌러비드는 자기를 두고 떠났다고 세서를 비난했다. 다정하게 굴지도 않고 미소짓지도 않았다고. 엄마와 자기는 똑같고 얼굴도 똑같은데 어떻게 자길 두고 떠날 수 있었냐고 말했다. 그러면 세서는 울면서, 절대 떠난 적 없다고, 적어도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아이들을 멀리 보내야만 했다고, 그동안에도 내내 젖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빌러비드」, 393p    

 

어째서 이런 과정이 용서와 구원일지는 아직 의아할지도 모르겠다.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자기)학대의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을 송두리째 짓이긴 그 선택과 그 기억과의 충분한 조우 없이는 용서나 구원을 도저히 시작조차 할 수 없다. 일단 마주해야 하고, 일단 그날에 대해, 그날의 선택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그 이야기가 결국은 자기 선택을 방어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것으로 시작할지라도 마치 없던 일처럼, 마치 지금은 괜찮은 것처럼 묻어두는 것에서는 미래를 불러올 수 없다.


그래서 세서는 결국 빌러비드에게 용서를 받았는가? 아니다. 적어도 그녀에게 용서 없는 구원은 없으므로 당연하게도 구원 또한 그녀에게 오지 않았다. 빌러비드는 홀연히 사라지고, 사람들은 빌러비드의 존재를 의식적으로 잊는다. 세서는 홀로 집에 남아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노래를 부른다. 그때 세서를 찾아온 온 것은 다름 아닌 폴 디다. 그녀에게 사랑이 너무 짙다고 말하던. 세서의 방식이 ‘네 발 달린 짐승’의 것이라고 힐난하며 떠났던. 매몰차게 떠났던 미래가, 거대한 과거가 노랫가락만을 남기고 떠나간 자리에 다시 돌아와 그녀를 껴안는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 옆에 자신의 이야기를 나란히 놓고 싶었다. 
“세서.” 그가 말한다. “당신과 나, 우리에겐 어느 누구보다 많은 어제가 있어. 이젠 무엇이 됐든 내일이 필요해.” 
그는 몸을 숙여 그녀의 손을 잡는다.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당신이  당신의 보배야, 세서. 바로 당신이.”

「빌러비드」, 445p      


무엇이 됐든 내일이 필요하다고 말하기까지 ‘많은 어제’는 필요 없다. 어떤 이에게는 단 하나의 어제가 삶 전체가 된다.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로 확연히 구분되는 삶이 아니다. 그 어제가, 그 기억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구성하고 지배한다. 다시 이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 질문에 답해보자. 그렇다면 기억의 주체는 죽을 때까지 혹은 정신을 놓고 다른 자아를 설정할 때까지 그 기억에 포획되어 살아야 할까? 내가 나인 채로, 그 기억과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는 없을까?  


폴 디가 기어코 세서에게 돌아온 「빌러비드」의 마지막 장면은 바늘구멍 같이 비좁은 틈으로 날카롭게 쬐는 햇빛 같다. 그 햇빛은 지난한 희망과 닮아있다. 다시 말하자. 세서와 빌러비드가 만났던 것은 용서와 구원의 과정이 아니었다. 세서는 그것을 얻지 못했다. 하지만 그 기억과의 조우는 용서와 구원의 가능성이었다. 미래는, 결코, 기억의 주체가 반드시 한 번 더 거쳐야 할 기억의 현장을 건너뛰고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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