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들도 이런 느낌을 받을까? 내가 사랑하는 걸 우주가 뺏어가는 것 같은 느낌. 구체적인 어떤 적대자가 나의 것을 빼앗아 가는 게 아니라, 기가 막힌 우연이 여러 번 겹쳐 생긴, 막상 겪으면 이건 필연이겠지, 운명이겠지, 하고 순응하게 되는 블랙홀 같은 사건이 내가 너무 사랑한 걸 삼키고 다시는 되돌려주지 않는 것 같은 느낌. 블랙홀은 우주에 그냥 있는 거니까, 그리고 너무 강력하고 거대하니까 저항할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블랙홀이 무엇을 삼켰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고 그걸 남들에게 설명해줄 수도 없다. 흔적이 없으니까. 블랙홀의 심연에는 블랙홀뿐이다. 블랙홀에 삼켜진 것이 삼켜졌다는 걸 나는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예전에는 내가 사랑하는 것에 대하여 친구들에게,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시도 때도 없이 떠들곤 했다. 머릿속이 그 대상으로 가득 차서 쏟아 내지 않으면 그게 덩어리 채 점점 커져서 나를 잠식할 것 같았다. 떠들면서도 계속 새로운 자랑거리가 떠올랐다. 심지어 뭘 자랑했더라. 밥을 얼마나 조용하게 먹는지? 짧은 머리가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속상해하는 표정이 얼마나 귀여운지? 그런데 어김없이 내가 사랑해서 내 것인 양 자랑한 대상들은 사라진다. 어디로? 알 수 없지만 내가 사랑했던 대상은 적어도 내게는, 그 대상의 탈을 뒤집어쓴 외계인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한없이 낯설고 한없이 잿빛이 된다. 한없이 멀고 한없이 혐오스러워진다. 어떻게 내가 그렇게 많은 사랑과 많은 이야기를 이 대상에게 쏟아부었지? 스스로 자책하게 될 만큼의 혼돈이 생긴다.
블랙홀이 삼킨 것은 그 대상이 아니라 그 대상에 대한 나의 사랑일까? 이 가정을 세운다면 뭐가 달라질까? 내가 한 대상을 죽을 때까지는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 내 사랑은 너무 가변적이어서 대상과 나를 위해 사랑을 시작하면 안 된다는 결론?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되기 전까지만 좋아하면 문제가 없을 거라는 또 다른 가정? 블랙홀이 내 사랑을 삼키면 또 다른 사랑을 낳아서 삼켜질 때까지 열렬히 키우면 된다고 인정하는 마음가짐?
위의 모든 문장들이 괴이하다. 왜 이렇게까지 나는 사라진 사랑의 대상에 대해 혹은 사라진 내 사랑에 대해 집념을 가지는 걸까. 왜 수없이 반복하고도 또다시 사랑하고 그 사랑을 자랑하는 걸까. 좀 덜어낼 수는 없을까. 감정을. 사랑을. 갑자기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내 사랑이 블랙홀에 먹혔다는 것을 피부로 절절하게 느껴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만 쓸쓸하게. 그 정도만 슬플 수 있다면 언제든 산뜻하게 새로운 반복을 할 수 있을 텐데.
김홍중 「은둔기계」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중독은 반복에 대한 사랑이다.’ 문장을 오래 곱씹다가 내 식대로 뱉어본다. ‘사랑은 반복에 대한 중독이다.’ , ‘반복되는 사랑은 중독이다.’ .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내 인생은 연속되는 대체 중독으로 무한한 구멍을 돌려 막는 거라고 확신했다. 사랑과 중독과 반복은 내 삶에서 빠질 생각이 없어 보인다.
어떤 친구가 그랬었지. 자기는 사랑이 너무 지겹다고. 이미 너무 많은 사랑을 해봤고, 그 사랑이 모두 자기에게 지독했고 상처로 가득했기 때문에 이제는 남의 사랑 이야기도, 자신의 사랑이 이야기도 재미없다고 그랬다. 오히려 그 친구는 이제 재테크, 커리어 같은 주제들이 흥미롭다고 했지.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친구의 마지막 일기는 온통 사랑 이야기였다. 블랙홀이 삼킨 사랑 이야기 같은 것.
사랑의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면 어떨까? 죽지 않고 외계인의 탈을 쓸 일도 없는 것. 음악, 책, 그림, 음식, 향수 같은 것만 사랑하면 어떨까? 그런 것들은 블랙홀이 삼켜도 그때의 내 상실감은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을 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대체불가능성은 사랑의 필요조건 아닌가? 결국 내가 이 에세이를 통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더라. 나는 사랑에 관한 한 언제까지나 이런 답 없는 질문을 반복하게 되고, 이 반복을 사실은 사랑하고 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