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다녀왔다. 인생에서 두 번째 제주인데, 혼자 다녀보니 지리에 영 재능이 없는 나도 어디가 서쪽이고 어디가 동쪽인지, 어느 리를 지나고 있는지 정도는 알게 되었다. 어느 날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바다가 보이는 카페만 돌아다니며 바다 멍을 때리거나 책을 읽거나 바다 사진을 찍었다. 카페 안에서도 오션뷰가 다 달라서 유목민처럼 자리를 옮기며 다른 풍경들을 감상했다. 작은 파도가 밀려와서 검은 바위에 부딪혔다가 산산이 사라지는 반복을 계속 지켜보았다. 같은 동작인 것 같은데 사실은 다 다른 무늬의 유일한 파생이다. 그럼 저게 진짜 반복일까. 무한한 반복의 틈에서 아주 미묘하게 다른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 삶과 예술이라는 생각을 자주 하지만 파도를 보면서는 더 절절하게 하였다. 요즘은 예술이라고 명명된 것을 하고 싶다기보다 내 하루를 예술로 만들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제주에서는 그렇게 살고 싶었고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버스를 두 시간씩 타고 이동을 하면서도 산뜻하고 가벼웠다. 버스에서는 졸다가 책을 읽다가 버스 밖 풍경을 사진으로 남겨놓기도 했다. 야자가 바람에 흔들리는 순간이라든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용두암의 어두운 바다라든지.
또 다른 날에는 협재 근처 도보를 따라 달렸다. 바람이 세서 서울에서 달리는 것보다 몸에 힘이 더 들어갔다. 맨날 서울에서만 달리다가 제주에서 여행자의 신분으로 달리니 색달랐다. 달릴 때만큼은 협재로 막 이주한 주민이 된 듯 이 땅과 풍경이 어색하면서도 내가 사는 곳 같고 살아야 할 곳 같은 느낌이 들어서. 걸어 다니면 여행자 같은데 레깅스를 입고 달리면 왜 이렇게 그곳에 터전을 마련한 주민이 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결국 똑같은 길을 오고 가는 반복이라서 그런가. 돌아올 곳이 있고, 돌아올 곳을 염두에 두어서 그런가. 아침의 협재는 바람이 더 신선하고 차가웠다. 파도는 더 선명하고 명랑했다.
또 다른 어느 날에는 필름 카메라를 대여해서 사진을 찍고 현상 체험을 했다. 70년대에 만들어진 캐논의 흑백 필름 카메라였다. 필름은 카메라 안에 들어간 순간 빛을 보면 안 된다고 했다. 찍어 놓은 풍경이 날아간다고. 절대 다시 열면 안 돼요. 그 말을 들으며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아담과 이브, 판도라의 신화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금기와 금기를 어기는 자들. 금기를 어김으로써 대대손손 전해질 이야기가 생긴다. 하지만 나는 신화 속 주인공 그릇이 아니다. 하지 말라는 건 안 한다. 필름은 암실에 들어갈 때까지 무사했고, 내가 담은 풍경들은 색을 잃어서 더 아름다운 채 박제되었다. 이야기는 없지만 흑백의 미학은 남았다. 사진관의 직원과 사장이 이렇게 진하게 현상된 필름은 오랜만에 본다며 감탄했다. 내심 뿌듯해서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혼자 미소를 지었다. 매뉴얼 잘 지키면 보통 이상은 하는구나. 나는 매뉴얼을 잘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었구나. 그게 좋았다. 보통 이상의 인간이 된 느낌. 너무 초과하지도 너무 미만이지도 않은, 보통에서 살짝 더 괜찮은 사람. 물론 아주 훌륭하고 특별한 사람이 되려는 욕망도 있지만, 여태 내 삶은 초과된 무력과 체념에서 기인한 보통 미만의 사람에서 벗어나려는 투쟁에 다름 아니었다. 이제야 좀 보통 사람 같네. 이제야 좀 혼자 잘 살 수 있겠네. 그런 안도가 생겼다.
지난하게 끌고 오던 프로젝트의 공식 종료 소식을 제주에서 들었고,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 것 같던 것을 일몰 직전에 발견한 기적도 제주에서였다. 기적은 내 삶의 어느 시간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지고, 깨진 보석 같은 햇빛이 얼굴과 어깨에 내려앉는다. 바다가 드넓게 보이는 창가의 소파에 앉아서 나는 혼곤히 잠에 빠져들었다. 왜 이렇게 졸리지, 이게 커피가 맞나, 생과 꿈의 경계에 서서. 대체 뭐가 이렇게 기적 같을까. 결국 순환이지만 궤도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것? 바다가 보이는 도로를 쭉 따라 걷다 보면 내가 돌아와야 했었을 곳이 그곳에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 야자수 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를 들으며 잠들 수 있다는 것? 하얀 침대에서 꿈을 꾸다 일어나면 칠흑 같은 바다가 제 자신을 먹으며 잔잔히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