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는 친구들을 만나면 구멍이 조금 메워지는 기분이다. 시 모임에 가면, 어떤 모임이든, 그 모임에서는 시 얘기를 원 없이 할 수 있고 어떤 소재에서든 가치 판단은 없는 편이며 이상한 표현으로 이야기해도 모두 자기 식대로 어떻게든 알아 들어준다. 내가 말하던 바와 다른 방향으로 받아들여지면 다른 이상한 표현으로 다시 얘기하고, 그들은 자기가 이해한 다른 이상한 표현으로 다시 그 주제에 대해 얘기한다. 하지만 그 표현을 여기에 그대로 적을 수는 없다. 정확하게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건 그들 머리에만 있는 표현이라서 아무리 노력해도 내 것이 되지 않는다. 그런 것에 안도감을 느낀다.
시를 쓰거나 읽지 않아도 자기만의 이상한 표현을 하는 친구들을 좋아한다. 그런 표현을 만나면 나는 잠시 멍하거나 띵하다. 이 세계는 아직도 낯설고 광막하다는 걸 일깨워주는 표현. 낯선 곳에서 언제까지나 표류하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그 자극은 무엇에도 견줄 수 없다. 이상한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건 그들에게 1+1=2가 언제나 성립하는 건 아니라는 걸 뜻한다. 이상한 표현을 할 수 있는 만큼 어쩌면 다수가 인정하는 상식에 반하는 행동을 스스로 행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어서, 그들에게 계속 자극을 얻으려고 나는 살아갈 원동력을 얻을 수 있다.
이미 알 만큼 알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의외의 모습을 의도치 않게 ‘발견당하는’ 순간을 사랑한다. 처음엔 낯설어서 거부감이 드는 듯하다. 하지만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면 낯선 그 사람의 다른 면이 더 궁금해진다. 어떤 행동을 하건 가치 판단은 조금 미뤄둔다. 조금 미루다 보면 영영 미루게 된다. 사람은 순간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떤 순간에는 차가웠다가 어떤 순간에는 너무 뜨거워서 데일 걸 알면서도,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껴안게 된다.
너 그때는 이랬잖아, 그런데 왜 지금은 이렇게 하지 않아?라는 말은 무의미하다. 일관성 있는 사람이란 거의 없다. 일관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존경스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튀어나오는 그 사람의 비정형성을 애정 한다. 그건 내게 시 같다. 그래도 나는 글을 보면 이름을 보지 않아도 내 친구 중 누가 썼는지 알 수 있다. 글은 가장 그 사람답게 쓰인다. 신기할 따름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사람 속은 모른다던데, 그걸 매일매일 체감하면서도, 문장에는 그 사람의 목소리와 눅진한 시간이 담겨있다.
한 사람의 시나 일기를 오래 보다 보면 제목과 글의 모양만 보고도, 혹은 첫 문장만 보고도 그 사람이 썼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것은 내게 희열을 안겨준다. 그 사람이 쓴 글을 반복해서 읽거나 그 사람에 대해 반복해서 글을 쓰면 그 사람을 종국에는 사랑하게 된다. 사랑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사랑은 시작된다. 글에는 그런 마력이 있다. 사람이 싫어질 때 글로 도망치는 이유다.
말로는 못 하는 것들이 글로는 나온다. 말로는 고작 보고 싶어, 좋아해, 사랑해, 미안해, 싫어해 밖에 못 하는데 글로는 보고 싶단 문장 없이도 그리움을 표현할 수 있고 싫다는 문장 없이도 그 사람의 마음을 난도질할 문장을 겹겹이 쓸 수 있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글로 그렇게 상처 준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래도 글을 놓지 못하겠다. 글은 눈빛 같다. 내가 지금 이 사람을 사랑하고 있구나, 깨닫는 순간은 그 사람의 눈빛에 내가 한참이나 머물러 있을 때다. 그 눈빛에 자꾸 무너지는 순간을 겪을 때이다. 혼자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데 그 눈빛이 내게 어떤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을 때이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순간이 많아서 글을, 눈빛을 사랑하게 됐다. 그것들에 기대게 됐다. 그러다 보니 아직도 나는 글을 쓰고 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도 글을 쓰고 죽고 싶은 날에도 글을 썼다. 다만 나는 모두에게 잘 읽힐 수 있는 쉽고 매력적인 글에는 재능이 없는 편이라 시를 택했다. 시는 내가 좀 별나도, 좀 우울해도, 좀 파괴적이어도 나를 받아준다. 내가 쓴 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를 좋아하지 않아도 내 시를 좋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시가 좋다. 나는 못 하는 걸 내 시는 해주는 것 같다. 오늘도 신작 시는 쓰지 못했고 여전히 등단도 못 했지만 그래도 시 쓰는 나를 놓지는 못할 것 같다. 묵묵히 써야지. 물론 묵묵히는 아니고 자주 투정 부리고 자주 화내고 자주 좌절했다가 찌질한 전 애인처럼 ‘자니?’를 시에게 반복하지만 그래도 써야지.
쓰다 보면 언젠가 나도 내 이름으로 된 시집을 낼 수 있을까? 더 많은 사람에게 읽힐 수 있도록 지면에 내 시를 실을 수 있을까?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지만 등단은 정말 모르겠고 시는 더 모르겠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어쨌든 시를 계속 쓰고 더 많이 읽히고 싶다. 나만 쓸 수 있는 이상한 문장들로 만든 이상한 세계에 당신들을 초대하고 싶다. 입구가 아직 안 보이시겠지만 곧 만들어보겠다. 입구를 만든 뒤에는 출구를 미로 끝에 숨겨둘 예정이다. 당신들이 내 세계에서 한껏 헤매 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