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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영 Jul 21. 2024

잃어버린 숲을 찾아서

외할머니의 집은 부안에 있다. 조그만 마당이 있고, 어린 나보다 조금 큰 꽝꽝나무가 있다. 안 쓰는 오래된 우물이 있고. 우물과 마당은 시멘트로 되어있다. 어릴 적 나는 그 마당에서 머리를 감고, 가끔 뛰어다니고, 가끔 시키는 대로 비질을 하고, 안 쓰는 우물을 몇 번이고 들여다보았던 것 같다. 


낮에 꾼 꿈에서는 외할머니 집의 마당이 나왔다. 눈이 조용하지만 부지런히 내리고 있었다. 이미 마당은 하얬고, 나는 펜치와 드라이버 같은 철물들이 담긴 미니 수레를 끌고 있었는데, 마당에서는 동네 무녀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칼도 들었었나? 굿인지 댄스파티인지 헷갈릴 만큼 신이 나 보였다. 바닥에 발을 동동 구르는 모양이 점프인지 춤사위인지 헷갈릴 정도지만 흥으로만 보면 그건 분명 춤이었는데, 마당 멀찍이서 풀샷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니 나도 그 춤판에 끼고 싶었다. 꽹과리 소리가 요란했지만 일정한 리듬의 반복이 있었다. 외할머니는 다른 동네 친구 두 분과 함께 수돗가 시멘트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재밌는 구경거리를 즐기는 표정으로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외롭거나 심심하거나 할 틈이 없다. 조그만 마당에서는 늘 할 일과 구경거리가 넘쳐난다. 그녀에게는 아직도 세상에 재밌는 것들이 많다. 재미를 귓속말로 공유할 수 있는 친구들도 있다. 


일어나 해몽을 해보았다. 무당이 춤추는 꿈은 지금 상황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될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무당이 굿을 하는 꿈은 연구자에게나 예술가에게 길몽이라고 한다. 세상에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고 사람들에게 존경이나 관심을 받을 거라고. 응,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뭐든 새로운 국면이 필요하다. 


그런데 왜 하필 꿈의 배경이 할머니 집이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요즘 내가 자각하는 나의 상태 때문인 것 같다. 요즘의 나는 98살 같다. 영생을 얻은 것처럼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지나치게 즐거운 것도 없고 흥분되는 일도 없다. 화나는 일이 있어도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화를 정성스럽게 내는 것도 에너지가 있어야 하는 일이라. 설레거나 오래 기억하고 싶은 일도 없다. 예전에는 온갖 꿈에 의미부여를 다 하고 꿈이 현실인 것처럼 꿈속의 내가 느낀 감정을 현실의 감정과 혼동하는 일도 있곤 했는데, 최근에는 그것도 그만뒀다. 기억에서 완전히 삭제하고 싶은 어떤 트라우마의 원형인 사람이 내가 나오는 꿈을 꾼 뒤 그것을 아련하게 기록해 놓은 걸 보고 소름이 끼쳤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내 꿈도 거세하기 바빴다. 


하지만 자기의 꿈에는 자기만 느낄 수 있는 어떤 미래적 낭만성이나 겹겹이 쌓인 종이 포장지 위로도 존재감을 감출 수 없는 달콤한 마들렌의 향기가 있는 게 분명하다. 내가 내 꿈을 거세하기 결심한 뒤로부터 나는 내가 소중히 품어왔던 어떤 정서를 잃어버렸다.


그 정서는 비현실적이다. 나조차도 짙은 안개 낀 숲을 더듬는 발걸음 같은 것으로 겨우 느끼는 것이다. 나는 그 정서로 시를 쓰고 일기를 썼다. 안개 낀 숲을 오래 산책하는 기분으로. 그럼에도 기대한 것 중 그 무엇도 발견하지 못 하는 낭패감으로. 그래도 나는 그 숲을 거니는 것을 좋아했던 것 같다. 아득하게 슬프고 아득하게 절망스러웠지만 가끔 안개가 희미해지면 기쁘고 설렜다. 고요하게 물 흐르는 소리를 듣고 가볍게 스치는 바람을 맞으면 희망을 가졌던 것 같다. 뭔가 있을 거야.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있을 거야. 더 가면 뭐가 있을 거야. 이게 끝은 아닐 거야. 


하지만 지금은 그 숲이 사라진 것 같다. 절대 잃을 수 없을 것 같던 것을 잃어버린 기분이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어떤 장면이 내게 다가와도 그것에서 뭘 느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몇 분 정도는 어떤 감정이 들지만, 포착해내기도 전에 그것이 사라져서 그 감정이 뭐였는지도 기록할 수 없고 복기할 수도 없다. 98살 같아. 너무 오래 산 것 같아. 영생을 이미 살고 있는 것 같아.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재밌고 뭐가 그렇게 치열하고 뭐가 그렇게 화나지? 그런데 정작 내 꿈속 외할머니는 할머니의 탈을 쓴 소녀 같았다. 키득거리는 표정으로 옆 할머니에게 귓속말을 하는. 뭐가 그렇게 재밌었을까. 단지 눈, 단지 춤추는 무녀, 단지 시끄러운 꽹과리일 뿐인데. 


“저 그만둘게요.” 라는 말을 참느라고 목울대가 뜨거워졌던 날들이 있었다. 나는 그 회사를 너무 편안하게 잘 다니고 있었는데, 왠지 어느 날부터 별 이유도 없이 우울감과 무력감이 찾아들면서 그곳을 정말 그만두고 싶었다. 잠을 하루에 10시간도 넘게 자고도 아침에 지각을 겨우 면했다. 힘든 일도,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없었다. 동료들과는 사이가 좋았고, 그곳은 어쨌든 객관적으로 메리트가 많은 회사였다. 그런데 나는 그곳에 내가 안 쓰는 우물처럼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그때 회사를 그만두지 않으려는 궁여지책으로 명품백을 할부로 샀다. 모두들 이렇게 하면 퇴사하고 싶은 생각이 사라진다고 했다. 사고 나서 배송이 되기까지 한 열흘 정도는 설렜다. 처음 가져보는 명품백이니까. 너도 나도 그런 걸 선망하니까. 그런 걸 내 돈 주고 내가 얻었으니까. 예쁘겠지. 맨날 메고 다녀야지. 이 옷에, 저 옷에, 이 신발에, 이 머리를 하고. 


그리고 그 가방이 도착했을 때 나는 택배도 뜯지 않고 한 달을 보냈다. 막상 가방을 받고 보니 내가 원했던 건 명품백이 아니라는 것을 상자만 보고도 너무 잘 알게 된 것이었다. 오히려 그 물건이 원망스러웠다. 할부를 갚느라고 당장 내일도 그만둘 수 있는 회사를 몇 달 더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니 괴로워졌다. 남의 욕망으로 내 진짜 욕망을 거세시킬 수 있다고 믿은 내가 한심했다. 내 진짜 욕망의 실현을 지연시키는 수단으로 남의 욕망을 아무런 의심 없이 갖다 쓴 내가 초라해 보였다.


그리고 결국 회사를 그만뒀을 때 내가 얼마나 싱싱한 꽝꽝나무 같았더라. 세상은 단연코 아름다웠다. 낮잠을 자며 맞는 햇살도, 책장 넘기는 소리와 가끔 기침하는 소리만 들리던 도서관도, 비빔국수를 만들고 커피를 내리는 일들이 선명하게 좋았다. 고작 그런 것들에 감동하고 곱씹고 행복하다고 하루에 몇 번씩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내가 갑자기 아주 많이 늙어버린 이유. 영생을 얻었다고 착각하는 이유. 회사를 그만두거나 애인을 사귀거나 등단을 한다거나 무언가 아주 색다른 도전을 한다고 해서 안개 낀 숲을 되찾을 수 있을까? 이걸 아주 오래 되찾지 못하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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