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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영 Jun 05. 2024

4. 부재의 존재

시가 아닌데 시인 것들이 있다. 어떤 풍경, 어떤 편지, 어떤 눈빛, 어떤 뒷모습 같은 것.


마지막 편지에 너는 나한테 죄책감 없이 살라고 했다. 나한테 죄책감을 말한 타인은 네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아니, 여러 명일 수 있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건 너 한 명뿐이다. 나는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뒤덮여 있는 사람이었는데, 네가 어떻게 그걸 알아냈는지 모르겠다. 이상하게 나는 그 뒤로 죄책감을 거의 느끼지 않았다. 네가 쓴 문장이 나에게 마법이라도 부린 듯.


편했다. 죄책감이 없으니까. 어쩐지 홀가분했다. 내가 나만 생각해도 되는 것이 자유롭다고 느껴졌다. 내게 어울리는 옷 같기도 했다. 그런데 네가 쓴 그 문장은 시도 때도 없이 틈입해 온다. 내가 혼자 있을 때,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리고 그 문장이 틈입해오면 어김없이 나는 슬퍼진다.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네가 그 문장을 적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가늠해보게 되는 것 같고 그러면 내 안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면서 무너지는 것이 동시에 일어난다.


하루키의 말처럼 이야기를 위해 존재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1). 삶은 당연하게도 이야기다. 나는 이 삶이 이야기임을 알았음에도 자연히 받아들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나는 내 삶이 고통스럽지 않고 무결한 행복으로 가득 차 있기를 바랐다. 폭력, 학대, 실연, 이별, 좌절, 실패 같은 것 없이 그와 반대되는 것들만 존재하기를 바랐다. 그런 걸 바랐던 나는 오히려 더욱 고통의 늪으로 빠져들게 됐다2). 하지만 내 이야기에는 꼭 그런 것들이 필요했으며, 이 우주 또한 그런 식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3)을 이제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모든 이야기에서, 악당 없이 존재하는 영웅은 없고 고난 없는 주인공도 없다.


시를 처음 배울 때 선생님은 말했다. “삶에 대해 쓰고 싶으면 죽음에 대해서 써야 해요. 빛이 주제라면 빛이 아니라 어둠에 대해서 써야 해요.” 나는 그때 사랑한다는 말 없이 사랑을 말하는 법을, 보고 싶다는 말없이 그리움을 표현하는 법을 알게 됐다. 시를 쓰는 법이 내 삶과 우주를 대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다는 것은 나에게 위안이 된다. 내가 소설이나 희곡이 아닌 시를 가장 좋아하고 시를 쓰고 싶어 하는 연원이 여기에 있다. 시에는 삶과 죽음, 사랑과 증오, 빛과 어둠,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의 경계가 없다. 이것은 결국 하나로 움직인다. 내가 죽고 싶다고 쓸 때 한편으로 내가 얼마나 잘 살고 싶은지에 대해 깨닫는다.


그래서 너와의 이별은 내게 시 같다. 마지막 편지에서, 내가 죄책감 없이 계속 살아주길 바라는 너와의 이별은, 내가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음을 최초로 증명하는 것이 된다. 나는 너와 헤어지고 나서 너를 너무나 사랑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이 사랑을 다시는 겪을 수 없다는 다른 깨달음이 나의 죄책감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이다. 너는 내 삶에서 사라짐으로써 영원해진다. 너는 나에게 언제까지나 그리운 사람일 것이다.






1) “I don’t like writing about violence and sex abuse – but I have to for the story’s sake” Some of his stories are about terrible things – he talked about a couple of horribly gripping moments in The Wind-Up Bird Chronicle: “I was so scared when I was writing it! All the translators complained to me, saying it  was scary. But writing it was much scarier! / I have to do that. The violence and sex  abuse are a kind of stimulation for the story. I don’t like to write them but I have to for  the story’s sake.”, <Haruki Murakami: 'My lifetime dream is to be sitting at the bottom of a well'>, The Guardian, Aug 24, 2014


2) “그건 너무 고통스럽잖아.” “인생이 왜 고통스럽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 내가 대학생 시절 아빠 트럭 앞자리에서의 대화. 나는 이때 고통에 너무 예민했지만 아빠는 인생에서 고통과 행복을 경계 짓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3) 대극의 내적 일체성을 게슈탈트 지각이론보다 확연하게 설명해주는 틀도 없을 것이다. 게슈탈트에 따르면, 우리는 대비되는 배경과의 관계 없이는 어떤 대상도, 어떤 사건도, 어떤 형태도 결코 인식할 수 없다. 예컨대 우리가 ‘빛’이라고 부르는 것은 실제로는 어두운 배경 위로 부각된 밝은 형상이다. 깜깜한 밤중에 하늘을 보고 밝게 빛나는 별을 지각할 때 내가 실제로 보고 있는 것-내 눈이 실제로 받아 들인 것-은 분리된 별이 아니라 ‘시야 전체’ 또는 ‘밝은 별 + 어두운 배경’이라는 게슈탈트(전체장 entire field)이다. (중략) 마찬가지로 정지와 관련시키지 않고는 운동을 지각할 수 없으며, 안락함 없이는 수고로움을, 단순성 없이는 복잡성을, 혐오감 없이는 매력을 지각할 수 없다. (중략) 따라서 한 쪽을 좋아하고 다른 쪽은 몹시 싫어하더라도 그 둘을 고립시키려는 시도는 쓸데없는 것이다. (중략) 세계를 분리된 대극으로 볼 때 삶이 왜 그토록 불만스러운 것이 되는지, 왜 진보가 성장이 아니라 암적이 되는지를 이젠 아마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립하는 양극을 떼놓으려고 애쓰면서 소위 고통 없는 쾌락, 죽음 없는 생명, 악 없는 선 따위의 ‘긍정적이라고 판단한 것들’에만 집착할 때, 우리는 실체가 없는 유령을 쫓는 꼴이 되고 만다,『무경계』, 켄 윌버 지음, 김철수 옮김, 정신세계사, 2012, 58-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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