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운명론자다. 운명론을 믿는 것은 구식이다. 요즘은 자기 생각대로 미래를 설계하고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 유행인 것 같다. 물론 나도 결과를 좌우하는 것은 행동, 행동을 좌우하는 것은 말, 말을 좌우하는 것은 생각이라고 믿기 때문에 생각이 ‘내가 원하는 것’을 끌어 오는 데에 최초의 실마리가 된다는 것에 일정 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나는 이 세계가 큰 틀에서 거의 모든 것들이 이미 정해져 있고, 정해진 곳으로 가는 길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가슴에 담을지 정도만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거의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이 별다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1)는 김홍중의 말에 더 깊이 동의하게 된다.
내가 나의 미래를 알 수 없는 한 나는 어떤 형태의 내일이 정해져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미지는 불안을 야기하고 불안은 에로스를 야기한다. 결국 미지의 것에서 에로스가 나온다. 내 삶을 아가페적으로 사랑할 수는 없어도 삶에서 에로스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나의 미래를 안다고 가정해보자. 아니, 미래라는 개념 없이, 헵타포드의 인식처럼 일괴암적2)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고 생각해보자. 영화에서 루이스는 딸이 병으로 죽는 순간, 어린 딸이 건강하게 뛰어놀 때의 순간, 남편을 처음으로 만나던 순간을 모두 겹쳐서 ‘동시’에 살 수 있다. 이 ‘사건’들은 모두 결정되어 있으며 어느 하나의 개별로 작동하지 않는다. 개별 사건으로 인식하는 순간 사건 간의 인과관계가 생긴다. 하지만 일괴암성은 인과관계 자체가 없는 온전한 하나다. 이 삶을, 그리고 나를 일괴암적으로 인식한다면 과연 나는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내가 이런 나라는 사실, 나의 기원인 나뿐이라는 사실, 내가 유동하는 에너지 그 자체이며 다른 에너지들과 교류하는, 에너지로서의 ‘하나’라는 사실. 그런 것을 깨닫는다. 나의 출생지, 나의 어린 시절, 나의 피부색, 나의 성별로 표기되거나 고착화된 내가 아니라 그것들로 말미암아 누군가 나를 판단하는 것으로서의 내가 아니라. 그러니까 나는 ‘내가 왜 이렇게 됐는지'에 대한 원인을 찾으며 고군분투할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의 ‘결과’인 나를 받아들이고 ‘하나’ 의 유기체3)로 이루어진 이 세상을 즐기면 된다. 누군가에게 상처받을 이유도 복수할 이유도 없어진다. 고통스러울 것도 집착할 것도 없어진다.
시라는 장르는 일괴암성 그 자체다. 내용은 철자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인데도 제목을 바꾸면 그 시는 완전히 다른 시가 된다. 마침표를 찍느냐, 말줄임표를 하느냐, 쉼표를 찍느냐, 아무 기호도 없이 마치느냐의 사소한 차이에서도 시는 완전히 흔들려서 다른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엔터 한 번으로 하나의 문장만 따로 떼어 연으로 놓았을 때는 어떠한가. 제일 첫문장을 삭제하면 어떤가. 제일 마지막 문장이 제일 처음에 왔을 때는 어떤가. 점을 찍느냐 마느냐의 차이로 전혀 다른 시가 될 가능성들이 시시각각 다른 우주에서 현실로 태어난다.
가끔은 제목을 다는 것만으로 그 글이 시가 아닌 것에서 시가 되는 경우도 있다. 가끔은 띄어쓰기를 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 글이 시가 아닌 것에서 시가 되는 경우도 있다. 가끔은 시간을 조금 꼬아보는 것만으로도 그 글이 시가 아닌 것에 시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들을 실험하는 것은 즐겁다.
부분을 바꾸면 전체가 모두 바뀐다는 것. ‘하나’로서 움직인다는 것. 내가 시를 쓸 때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면 세상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세상을 대할 때 이것을 인식할 수 있다면 당신을 대할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당신과 하나로서 움직인다. 불가능해보이는 이 ‘하나’로서의 인식이 폭력의 실마리가 아니라 이미 ‘결정’되어 있는 사랑에 도달하는 중 발견한 한줄기 햇볕 같기를 바란다.
1)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 내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을지도, 당신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죽을지도, 지구가 어떻게 종말을 맞이할지도 결정되어 있다. 결정되어 있지 않은 것은 없다. 모든 것은 결정 되어 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사실은 별다른 의미를 갖고 있지 않다, 『은둔기계』, 김홍중, 문학동네, 2020, 95쪽.
2) 헵타포드의 문자도 페르마의 원리와 비슷한 원리로 쓰인다. “최초의 획을 긋기도 전에 문장 전체가 어떤 식으로 구성될지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이런 능력을 소설이나 영화에서 동시성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동시성이라는 말도 어쩌면 인간의 시간개념에 기댄 표현인 것 같다. 나는 일괴암성(一塊巖 性)이라는 말이 더 적확하지 않을까 싶다. 부분으로 더이상 나눌 수 없는, 그 자체가 하나의 덩어리로 서 완전한 실체 말이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건을 하나하나 뜯어서 순차적으로 이해한다. 인간이 쓰는 문장을 주어, 서술어, 목적어로 나누어 이해하듯이 말이다. 이처럼 부분적인 요소로 나누어 전체를 이해하는 방식을 환원주의라고 한다. 환원주의는 특히 세상의 궁극적인 구성요소를 탐구하는 입자물리학에서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방식이고 또 큰 성과도 거두었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원자이고, 원자는 다시 전자와 원자핵으로 나뉘며, 원자핵에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있고, 이들은 다시 쿼크와 접착자로 구성된다, 이런 식이다. 하지만 일괴암적인 실체에서는 이런 분석이 무의미할 수도 있다. 생물체를 갈가리 찢어 원자 단위까지 쪼개버리면 생명현상은 사라진다, <[스페셜] 헵타포드의 일괴암적 인식>, 이종필, 씨네21, Feb 22, 2017
3) 입자들이 확실히 보여주는 것은 “모든 것은 서로 보이지 않는 연결성에 의해서 한 덩어리로 짜여 있다(woven together)”라는 사실이다. 데이비드 봄은 미시세계의 양자역학과 거시세계의 상대성이론 사이의 이러한 간극을 어떻게 극복하고 두 이론적 틀을 통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는 두 이론체계의 차이점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먼저 두 이론체계의 공통점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공통점은 우주 전체의 ‘깨어지지 않는 전체성(unbroken wholeness)’이다. 인간이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추상적 개념은 ‘전체’가 아니라 오히려 ‘부분’이다. 양자역학은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하나의 전체’를 이룬다는 것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봄이제안하는 우주의 모습은 ‘하나의 유기적 전체(organic whole)’다, <기존의 세계관을 벗어나야 내면소통이 보인다>, 김주환, 김주환의 내면소통, Youtube, July 2,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