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빔이 나를 처음에 만나고 한 말은 이거였다.
“너는 애가 좀 떠 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발이 안 붙어있어, 땅에. 떠다녀.”
나는 그 말을 비현실적이라는 말의 은유로 들었다. 그런가. 나 되게 현실적인 사람인데. 그 말이 무슨 말인지 가늠하기가 꽤 어려웠다. 나는 스스로 객관화하는데 아주 취약한 사람. 하지만 남들이 내게 한 말은 차곡차곡 쌓아서 먼지 쌓일 틈도 없이 들여다본다. 너무 매만져서 반들거릴 때까지. 윤이 나다 못해 닳을 때까지. 그들이 내게 한 말을 모아서 나라는 사람을 인식한다.
나처럼 현실적인 사람이 어딨다고? 나는 너무 현실적이어서 그렇게 즐겁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일을 몇 년 동안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돈이 떨어지는 게 싫으니까. 나는 너무 현실적이어서 아주 좋아하는 애인과도 헤어진 사람이다. 이 애와 확실히 보장되는 미래를 그려볼 수가 없으니까. 나는 너무 현실적이어서 그다지 행복하지 않을 때가 훨씬 더 많다. 녹록지 않은 현실만 생각하다가 바싹 늙어버린 노인을 품고 사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이런 말을 들었지. 그 말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는 어느 시인의 이메일 합평 수업을 듣게 되었다. 시를 써 보내면, 약속한 며칠 뒤에 내 시를 읽고 시인이 장문의 편지를 보내온다. 시에 대한 감상이 주를 이루는데, 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내 시만을 보고 시 속 인물들이나 풍경, 문장에 대해 섬세하게 짚어준다는 점이 좋았다.
오프라인 합평을 가면, 그게 수업이든 친구들과 함께하는 모임이든, 우리가 서로의 이야기를 공유할수록 시와 시 쓴 사람을 어느 정도 겹치도록 놓는 부분이 있고, 그것은 이해받는다는 안락함을 보장함과 동시에 새로운 나를 펼칠 수 있는 가능성과 점점 더 멀어지게 한다. 한동안 나는 안락한 소파에 누워 여유를 즐겼다. 그러나 이제는 일어나서 몸을 털고 바깥으로 나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시. 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무작정 내 시를 들이밀고, 내 시를 통하여 나를 투과해 새로운 나를 반사해내는 가능성의 세계로.
그런데 나는 오랜만에 나온 이 세계에서 언젠가 한 번 만났던 나를 다시 한 번 마주치게 된다
.「가영 님의 시의 좋은 점은, 읽은 뒤에도 생각이 난다는 점이에요. 읽고 난 뒤에 한 번쯤 헬륨 풍선처럼 다시 떠오른다는 점.1)」
「떠오르고, 또 끊임없이 떠오르는 동물원의 가벼운 풍선처럼 가영 님의 시를 가벼이 바라보았다가 그 풍선에 매달린 무거운 추를 만지작거리게 되는 것이 제가 가영 님의 시에서 느끼는 감상인 것 같아요. 닿을 듯이 닿지 않는 그 미묘한 거리감 속에서 계속될 가영 님의 시를 기다리고 있을게요. 고맙습니다.2)」
그런가. 언젠가부터 나를 처음 보는 사람들은 내가 현실에서 조금 유리되어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유리되어 있는 지점이 현실의 뒤편이나 이면이 아니고 현실이 온전히 보이는 공중이라는 점은 생각해 볼 만하다. 분명 발이 땅에서 조금 떠 있다는 표현이나 헬륨 풍선 혹은 동물원의 가벼운 풍선이라는 표현은, 하늘보다는 공중에 가깝다. 심지어 서윤후 시인에게 보낸 나의 합평 시는 남산을 오르는 내용이었다. 희한하지. 두 발로 단단히 남산을 오르고 있는데, 왜 이 시인은 풍선을 떠올렸을까. 그러나 시원하게 날아가지도 못하는, 풍선을. 조금 뜨다가 어떤 공중에 매달린 듯 멈춰버리는, 무거운 추가 달린 풍선.
어쩌면 나는 아주 낮은 비행3)을 해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내 현실이 지난하고 때로 참을 수 없이 증오스럽지만, 그래도 나는 현실을 아주 외면하는 방식으로, 현실을 이 땅의 누구도 발붙이기 어렵도록 장엄하고 척박한 행성처럼 변모시키고 싶었다기보다, 단지 현실에 너무 밀착해있던 내가 현실을 조금 스치며 틈을 만들고, 그 틈 안에서 유영하는 풍선이 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질량으로. 절대 사라질 수 없게.
1) 서윤후 시인의 이메일 시 합평 클래스, 두 번째 레터, Feb, 2024
2) 1)과 동일
3) 내가 쾌적하게 느끼는 것은 아주 낮은 비행이다. 사물을 스치되 사물에 붙어버리지 않는 정도의 위치다. 스치는 틈으로 문장이 운동한다. 말의 속도와 위치 변화가 가능해진다. 말이 운동을 하고 있느냐가 생기의 관건이다. 운동이 원활하게 진행되면 탄성이 생겨 시가 움직이게 된다. 움직이면 된다. 시 는 스스로 움직여서 읽는 이를 움직이는 것이다, 『내가 없는 쓰기』, 이수명, 時란, 2023, 22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