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영 May 08. 2024

1. 타임머신 타기

이 글은 시를 ‘쓰게(읽게) 된’ 나를 역추적하여 무엇이 나를 시로 이끌었는지 밝히는 글이다. 현대사회는 “너는 할 수 있다”라는 정언이 지배하는 성과사회다.1) 성과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속도가 뒤처진다. 뒤처진 사람은 성과가 줄어든다. 실제로 그렇지 않더라도, 그런 압박감에 항상 시달린다. 뒤에 있는 것은 고통, 회한, 그리움, 추억뿐이다. 그것들은 모두 힘이 없다고 여겨진다. 그것들에 발 묶이면 앞으로 달려갈 수 없다. 그것들을 지켜보다가 밤을 새우게 된다. 그런 채로 아침을 맞이하면 나는 성과를 이룩할 에너지가 없다. 그러므로 성과사회를 사는 나는 의도적으로 뒤를 없앤다.


하지만 구조적 학대가 만연한 이 사회에서 무엇이 되기의 여정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 되었는가2)에 대해서 돌아보지 않으면, 언젠가 내 안에서 들끓던 무언가가 무시무시한 형태로 터질 것이다. 그 형태는 폭력과 가까울 것이다. 그 형태는 학대에 가까울 것이다. 일단 나는 내가 무엇이 되었고, 무엇이 될 수밖에 없었던 과정을 짚고 싶다. 내가 누군가의 뺨을, 머리를 마구 때리고 싶은 충동을 왜 가지게 되었는지, 어째서 그런 충동을 억누르며 우는 내가 되었는지 먼저 이해하고 싶다.


그저 이런 ‘나’로 그냥 태어났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억울한 지점이 많다고 느낀다. 난 왜 이런 내가 되었지? 뒤를 돌아본다. 뒤를 돌았더니 아주 당연하게도 내가 겪고 보고 들었던 폭력과 학대의 역사가 펼쳐진다. 처음에는 일기에 사건과 감정을 기록했다. 하지만 시를 쓰는 나는 기록자이기보다 창조자에 가까웠다. 시에서 그 역사에 대한 재현과 구성이 시작되었다. 인물을 재구성하고 시공간을 비틀면서 역사에 기반한 하나의 또 다른 세계를 만들었다.


‘내’ 안에 들끓던 것이 고여서 썩은 내를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내’ 의도를 통해 터진다. 흐른다. 누구도 해치지 않을 수 있는 방식으로, 내 통제 하에 터지는 것의 모양과 색깔과 촉감을 결정할 수 있고, 나는 그것을 의도하여 괴이하거나 괴이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릴 수 있다. 반면에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그대로 그릴 수도 있다. 나는 피해자, 가해자, 관찰자 누구든 되어볼 수 있는, 나만의 세계들을 만들었다. 이 과정은 내게 희열을 안겨주었다.


이런 재현-구성 과정이 내가 결국 폭력과 학대의 역사를 지나 무엇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조망하고 이해하는 데에 그치지 않으면서, 단지 희열을 주는 것 이상으로 내게 어떤 의미를 주었나? 시를 읽을 때 뇌는 기억을 되짚는 것뿐 아니라 ‘감정’을 불러일으킨다.3) 회상과 동시에 감정이 일어난다는 것은 결국 그 ‘시간’을 다시 사는 것과 다름없다. 육체를 옮겨줄 물리적인 타임머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시를 읽을 때 뇌는 어떤 ‘시간’을 다시 살 수 있으므로 시는 뇌의 실존적 타임머신이다.


시를 쓰기 위해 다른 이들의 시를 읽고, 시를 완성한 뒤에 몇 번이고 거듭 내 시를 읽어보는 과정은 결국 타임머신을 타는 것과 같았다. 이 타임머신을 타고 내가 다시 살기로 선택한 시간은 내 인생에서 유쾌하고 행복하고 따스했던 시간이 아니었다. 나는 폭력과 학대의 시간을 다시 살기로 선택했다. 내가 폭력과 학대를 좋아해서가 아니다. 폭력과 학대의 시간에 매몰되지 않기 위해, 그것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다.


나는 나만의 안전한 요새를 만들고 그곳에서 내가 그토록 혐오했고 두려워했던 것을 끊임없이 반복, 재구성한다. 이곳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안전하니까. 안전한 곳에서 나는 장치를 바꾸고 대사를 바꾸고 인물을 바꾸고 공간을 바꾸면서 나를 덮치려던 것이 흉측하고 거대한 괴물이 아니라 단지 ‘그것’ 자체였음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일어났고 ‘그것’ 은 언제나 또 일어날 수도 있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폭력과 학대의 시간을 다시 사는 ‘나’를 거친 뒤에야 나는 비로소 내 인생의 유쾌하고 행복하고 따스했던 그 시간을 어루만지고, 그 시간이 다시 내게 찾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 시간이 바로 ‘지금’도 시시각각 흐르고 있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밝힐 수밖에 없다. 나의 시 쓰기는 폭력과 학대의 시간으로부터 나의 삶을 복원하기4) 위함에 다름 아니었다고.






1) 신자유주의 사회, 또는 ‘성과사회’에서는 “너는 할 수 있다”는 정언이 지배한다, <한병철 “성과에 집착 스스로 착취” 신진욱 “그 역시 타인에 의한 착취”>, 한겨레, May 15, 2012


2) 무엇이 되기의 여정을 연대기별로 묶어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무엇이 되었는가에 대해 더 이상 거짓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비겁하고 쓸쓸하고 건강하지 못하며 폭력적인 정서와 중독적인 성향을 가진 성공한 흑인 작가가 되었습니다. 그 책을 쓰면서 이 땅의 누구에게도 솔직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구조적인 학대가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을 결정짓지만, 내가 이 나라에서 가장 해를 끼친 이들은 바로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것들이 내게 미국으로 느껴지는 반면에>, 키에스 레이먼,『엄마와 내가 이야기하지 않는 것들』, 미셸 필게이트 외 14인 지음, 이윤실 옮김, 문학동네, 2019, 199-200쪽.


3) 의식 연구(Journal of Consciousness Studies)지에 발표된 한 연구는 뇌의 “독서 신경망”은 어떤 글을 읽을 때에도 활성화된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중략) 시와 산문을 비교했을 때 연구진은 시의 경우 우리가 자신을 돌아볼 때 활성화되는 대상피질(posterior cingulate cortex)과 중앙측두엽 (medial temporal lobes)을 활성화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특히 자원자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읽었을 때 자원자의 뇌에서는 “독서 신경망”보다 기억과 관련된 부위가 더 크게 반응했으며,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읽는 것이 강력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일종의 회상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What You Read Matters More Than You Might Think>, Psychology Today, June 7, 2016

  
4) 19. 이것은 내가 폭력으로부터 벗어나 나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 했던 일들이다.

20. 우리의 발화가 더 많은 폭력을 환히 비추기를, <폭력에서 벗어나기>, 유진목, 문장웹진, 202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