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 관하여
아이슬란드에 갔었다. 대학교 마지막 학기에 공연장에서 주 5일을 근무하고, 졸업 후 한옥마을의 게스트하우스에서 하우스키퍼를 하면서 모은 돈으로. 자유여행은 아니었고, 국제워크캠프라는 NGO 단체에 자기소개서와 지원동기를 쓰고, 국가와 기간과 참여하고 싶은 테마의 봉사를 선택하는 거였다. 선정되면 나와 같은 국가와 기간과 캠프를 선택한 각국의 청년들이 지정 숙소에 모였다.
나는 혼자서 코펜하겐을 경유해 아이슬란드에 도착했다. 밤 아홉 시였나. 새벽 두 시라고 해도 믿을 만큼 컴컴했다. 세상 제일가는 길치인 나는 공항에서 레이캬비크까지는 어찌어찌 왔는데 그곳에 도착해서는 숙소를 한참이나 헤맸다. 결국 택시를 탔고, 택시를 타니 허무할 정도로 바로 근처였다. 숙소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따뜻한 노란 조명과 안락한 카펫과 꽉 찬 신발장이 보였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몇몇 나와 나를 맞아주었다. 인적 없는 이국의 밤거리를 헤매다가 처음 보는 외국인들의 각양각색의 환대를 받으니 마음이 온천에 담가 놓은 것처럼 풀어졌다.
우리 캠프에는 나 포함 한국인 두 명, 영국인, 프랑스인, 인도인 부부, 일본인 커플, 러시아인, 체코인이 있었다. 우리는 매일 저녁 당번을 정해서 각자 나라의 요리를 해주었다. 캠프에는 생선과 유제품 등은 먹는 페스코와 소를 먹지 않는 힌두교인, 유제품 알레르기가 있는 프랑스인이 존재했으므로 요리를 할 때에는 이들 모두를 고려해 두세 가지 음식을 해야 했다. 그때 한국인인 히키와 나는 할 줄 아는 요리가 거의 없어서 진땀을 빼며 찜닭과 샐러드 같은 걸 준비했는데, 맛있는 한국 음식을 제대로 대접하지 못한 것에 대한 송구스러움이 어찌나 컸던지. 타임머신이 생긴다면 그때로 돌아가 비빔국수와 프라이드치킨과 크림 리조또 같은 걸 해줄 것이다.
그때 우리 캠프의 테마는 저널리즘이었다. 레이캬비크 웹진에 우리가 취재한 주민들의 이야기를 실어야 했다. 우리는 조를 짜서 인터뷰를 다녔고, 내가 속한 조에는 라파엘(프랑스인: 내가 제일 애정 했던 게이 친구)과 료타쿠(일본인:내가 한 찜닭을 세 번이나 리필해 먹던 기특한 아이)가 있었다. 우리는 레이캬비크의 상점과 공공기관을 돌아다니며 즉석에서 인터뷰를 요청했다. 스페인 남자에게는 이주 이유를 물었고, 어떤 여자에게는 레이캬비크의 교육에 대해 물었다. 답변은 기억나지 않고 다만 라파엘이 스페인 남자가 자기 스타일이라 하여 나는 나와 좋아하는 스타일이 겹친다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우리는 코가 시뻘게지고 손가락이 얼 때까지 돌아다녔다. 숙소에서는 인도인 부부와 일본인 커플 빼고 우리 캠프 사람들이 다 같은 방을 썼고, 우리는 각자 침대에 누워 같은 시각에 잠들었다. 나는 영어 수준이 비슷한 라파엘과 가장 친했다. 나는 그때 외국인들의 퍼스널 스페이스를 몰라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마구 치대곤 했는데, 라파엘은 내가 꼭 옆에 붙어서 살을 맞대고 앉아있어도 아무렇지 않아 했다. 라파엘은 유제품 알레르기가 있었는데 희한하게도 그 애의 몸에서는 우유와 치즈 냄새가 진하게 났다. 그 애의 몸 냄새와 윤기 나는 곱슬머리와 얄팍한 얼굴형과 가느다란 손가락에 조그만 손톱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애가 주차장에서 섹스를 안 해봤느냐고 묻던 것도, 레이캬비크의 랜드마크인 대성당을 보고 마치 성기 모양 같다고 하던 그 말들도.
러시아 친구가 선물로 준 작은 국자를 나는 아직도 쓰고 있다. 료타쿠와 리나가 내가 아이슬란드를 떠나던 마지막 밤에 나를 거리까지 배웅해주고, 눈물 글썽이던 것을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억한다. 여행에 동의어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다. 오로라가 뜨는 세상의 끝에서 만난 친구들이 내 여행의 전부이고, 나는 한국에 돌아와 혼자서 중얼거렸다. 모두들 잘 살아. 어디서든 보자, 어디에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