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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영 Jul 21. 2021

유목

얼렁뚱땅에 관하여

얼렁뚱땅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일이 있었다. 좋아하는 줄도 몰랐는데 어느 날은 술자리에서 걔만 보게 됐다. 웃는 모습과 귀가 참 귀엽다고 생각했다. 얼렁뚱땅 헤어지게 된 일도 있었다. 헤어질 결심도 없이 내 의사로 헤어지게 됐다.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당장 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스스로 만들었기 때문인데, 또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모순된 얘기지만 나는 어떤 운명적인 폭풍에 탑승해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헤어지자고 말하는 순간에도, 헤어지고 나서도 나는 문득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상황을 통제한다는 느낌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폭풍의 제일 꼭대기에 실려서 어딘가로 이동 중인 것 같았다. 분명 내가 헤어지자고 말하는 그 순간에도 말이다.


나는 운명론자다. 내 삶의 모든 것들이 이미 정해져 있고, 그 정해진 수순대로 가기 위해서 1초도 늦지 않게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어떤 마음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SF작가 테드 창은 운명론에 관한 단편소설을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조차 운명론 안에 포함된 거라고 말했다. 나는 앞의 주장에 동의하는데, 저 주장에 깊이 동의할수록 삶에 대한 비관적인 생각을 지우기 힘들 것이다. 모든 게 정해져 있다면, 그리고 자유의지조차 운명론에 포함된 거라면, 굳이 열심히 살아가고 싶지 않을 때 열심히 살아갈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또한 노력 여하와 상관없이 어떤 사람은 원하는 것을 쟁취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원하는 것을 평생 단 한 번도 쟁취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운명론도 얼렁뚱땅 믿어서, 왠지 그렇게 비관적이지는 않다. 내 선택으로 뭔가가 바뀐다고 생각하고 내 선택에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어떤 운명에 휩쓸려서 내가 내린 선택이라도 나는 그 선택에 대한 이유를 단 한 가지라도 찾을 수 있기 때문에 그 선택의 주인이 나라고 생각한다. 혹은 내 무의식이 미래의 나를 위해서 더 나은 선택을 지금 내린 거라고, 의식의 나는 조금 후의 미래에 도착해서야 과거의 내 선택을 다행스럽게 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타인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고 믿는다. 타인은 그들의 운명대로 잘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는 그들에게만 부여된 해야만 하는 일들과 개성과 마음이 있다고 믿는다. 그게 다 운명 안에 포함된 거라고 생각한다. 그걸 내 자유의지로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을 자기가 원하는 방향대로 변화시키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만을 사랑하는 사람이지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고도 생각한다. 그것이 아무리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처럼 보여도 자발적 의지가 아닌 이상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는 폭력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운명론을 믿어서 행복한 때는 없어도 다행인 때는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게 됐을 때, 오래된 친구와 서먹해져 이제는 친구라고 부를 수 없을 때, 가족들과 아주 멀어져서 연락도 하지 않게 됐을 때에 내 탓을 하지 않게 된다. 내가 그때 조금만 더 잘했더라면, 내가 그때 그렇게 말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후회들을 하지 않게 된다.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으므로. 이미 정해진 대로 멀어지게 됐으므로. 가슴이 아프지만 그게 누구의 탓도 아니므로 유목민의 마음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이제 이곳은 황폐하니까. 더 이상 가축을 먹일 풀이 없으니까. 가축을 먹일 수 없다면 나도 살 수 없는 거니까.


떠나면서도, 떠나서 다시 정착한 곳에서도 삶은 지속된다. 지긋하지만 가끔은 아름다울 때도 있다. 영원한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운명으로 엮인 이 사람들과, 이 사람들과의 시간을 더욱 소중하게 여길 수 있게 된다. 나는 유목민의 마음으로,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는 만남을, 사랑을, 배부름을, 햇볕을 더 찬란하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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