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새에 관하여
어떤 때는 냄새에 둔했고 어떤 때에는 예민했다. 나는 내가 후각으로 기억을 불러들이는 사람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후각으로 누군가를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인 것은 알고 있다. 술과 담배, 고기 냄새가 오랜 시간 축적된 몸 냄새를 풍기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체취가 너무 강해서 저 멀리서 걸어오는데도 존재감이 확실한 사람들을 싫어한다. 향수 냄새가 너무 짙어서 밥을 먹을 때 향수를 먹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드는 사람들을 싫어한다. 음식도 마찬가지다. 나는 향신료가 강한 이국의 음식들을 먹지 않는다. 평소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작동하던 내 후각이 유독 강한 정체성을 가진 냄새 앞에서는 있는 힘껏 가동된다는 사실이 못마땅하게 느껴진다.
내가 싫어하는 것의 총합이 나라고 느껴질 만큼 나는 싫어하는 게 많고, 싫어하는 게 확실한데 싫어하는 걸 말하는 순간의 내가 싫다. 세상에 싫은 게 많아서 자살하고 싶은 기분이 들 때도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내가 좋아하는 냄새에 대해서 써야 하는데. 왜 싫어하는 냄새들로 한 문단을 채웠을까. 하지만 나는 항상 그래 왔다. 좋은 것들을 택하며 살아왔다기보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것들을 피하는 삶의 방식을 유지했다. 여기 있는 게 좋아서라기보다 저기 가는 것이 죽을 만큼 싫어서였기 때문이었다. 이 일을 하는 것이 내 삶에 최적의 선택이어서가 아니라 저 일을 한다면 우울증에 시달릴 것이 뻔하기 때문이었다. 이 사람을 못 견디게 사랑해서 만난 것이 아니라 혼자인 것이 못 견디게 나락인 것 같아서 만날 수밖에 없을 때도 있었다.
이런 내 삶의 방식을 생각하다 보면 내 삶의 거의 모든 순간에 지독한 냄새가 풍기는 것 같다. 지겹지 않나. 이렇게 사는 거. 매번 최선이 아니라 차악을 선택하며 사는 것. 비자발적으로 도망치는 삶. 도망친 곳에서 또다시 도망치는 삶. 한 번도 뭔가를 있는 힘껏 좋아해 본 적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황홀한 냄새를 맡아도 종국에는 그 냄새에 둔해지거나 지겹다고 느끼는 것처럼. 내가 입장할 수 있는 유토피아가 없다는 걸 나는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애인의 살 냄새 맡는 걸 아주 좋아한다. 나는 애인이 생기면 꼭 귀 뒤쪽과 얼굴과 가슴에 코를 파묻고 냄새를 맡는다. 지금 나만 아는 냄새. 그런 냄새를 맡고 있으면 안정감이 들고 우리는 영영 우리일 것 같고. 나는 애인의 살 냄새를 킁킁 맡고 전혀 싫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사랑을 느끼니까. 나는 내게서 나는 냄새를 정말 싫어하는데 애인의 냄새는 그렇지 않다. 내가 하루 종일 입었던 옷을 벗어서 냄새를 맡아보면 기분이 나빠진다. 나한테서 이런 냄새가 난다고? 스스로의 냄새를 맡고 불쾌해진다. 그래서 나는 내 냄새를 감추고 싶을 때마다 바디 미스트와 향수를 뿌리고 집에서는 향을 피우고 캔들을 켜 놓는다. 아무리 자주 그래도 내 체취가 바뀌는 일은 없지만. 내가 맡고 있는 내 냄새가 진짜 내 냄새가 아닐 확률이 높지만.
가끔은 나에게서 나는 냄새와 나에게서 비롯된 감정들을 감당해주는 애인이 기특해서 사랑할 때가 있다. 나는 나를 못 견디는데 너는 나를 견디고 있네, 이런 생각이 들면 무한정으로 나도 그를 견디고 싶어질 때가 있다. 나는 입버릇처럼 어떤 나라도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니까. 그렇게 될 수 없으니까. 내 삶의 악취를 항상 맡고 있으면서도 그걸 피할 수 없고 그것에 익숙해질 수도 없으니까. 그걸 영영 싫어하다가 나 대신 내 냄새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만나면 나는 그에게 희망을 걸어본다. 나도 사랑받을 수 있을까. 이 지겨운 냄새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더 이상 스스로를 싫어하게 되지 않을 수 있을까. 매 순간 의심하면서도 매 순간 다시 믿어보는 마음으로.
마음껏 창문을 열고 환기할 수 있는 계절이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