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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마도당근 Jul 01. 2021

바다에서 전화해줘서 고마워

 저 멀리서 몰려오는 게 꽤나 커 보여서 뒷걸음질 쳤는데, 막상 가까이에서 부서지는 걸 보니 흐느적거리고 말아 버린다. 저 멀리에 있을 때는 꾸물거리며 오기에, 별 볼 일 없는 친구일 줄 알았더니만, 허벅다리까지 짜게 적셔 버린다.


 


 “전소 언니, 다 그런 거 아니겠냐? 결국 코앞에 오면 작아질지 커질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 그렇게 좋았던 사람은 다 떠나가고, 4년 내내 학교 같이 다녀도 막 학기 되어서야 친해져서 언니랑 날아 바다에 다 오고.” 정말이다. 단둘이 바다에 올 줄은 꿈에도 몰랐던 동기랑 바다에 와서 가만히 쪼그려 앉아 감히 인생을 논하는 궁상맞은 이야기를 할 줄도 몰랐다. 다 결국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그냥 눈앞에 있는 사람과 당장 행복하면 되는 것이고 우리는 지금 배도 부르고 소금 바람도 맞고 있으니 잘 살고 있는 거라고 낄낄대며 웃던 날이 생각나서 바다에 오고야 말았다.


 


 이 친구가 울렁거리고 부서지는 모양새를 가만히 보고, 듣고 있노라면 금방 마음이 편해진다. 이렇게 한 발자국 떨어져서 지켜보면 그냥 반짝거리는 물 덩어리인데, 밤에 찾아오면 멀리서 봐도 날 잡아끌어 삼켜버릴 것 같다. 피노키오가 고래 배에 들어갔던 것처럼 말이다. 이 친구가 너무 커질 때는 차라리 고래 배에서 불 피우고 있는 피노키오 마냥 그 안으로 들어가 잠깐 쉬고 싶을 때가 있기도 하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띠동갑 친구와 함께 했던 날들이 생각난다. 다섯 바퀴나 돌아야 하지만, 어쨌든 띠동갑이니 동갑내기라는 것이다. 당신은 어릴 적부터 “우리는 친구지? 동갑내기 친구” 묻고는 했다. 막상 당신의 얼굴을 마주하면 걱정되는 게 한두 개가 아닌데, 보이지 않아도 걱정되지만 그래도 보고 싶은 당신은 바다와 닮았다. 그래도 보고 싶어 지게 만들어 이렇게 찾아오게 하고, 불현듯 생각나서 옛 기억을 모조리 끌고 와 버리지 않는가. 당신과 당신의 짝꿍이 나에게 주었던 금반지가 또 생각난다. 비누로 반딱거릴 때까지 닦아 내 왼손 엄지손가락에 끼워주었지. 괜히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당신에게 전화를 건다.


 


- 나 바닷가 왔어요, 할아버지. 저녁은 뭐 드셨수?


~~~ 조심해 우리 아가.


- 뭘 조심해요? 바닷가에는 안 들어갔어요!


~~~ 그래도 조심해. 모기도 있고 모래도 있잖아. 모기향 틀어야지.


- 알겠어요. 근데 이미 이마에 물렸는데 우짤까?


~~~ 아이구, 모기 주의해야지... 근데 아가, 고마워.


- 뭐가 고마워? 할아버지가 고마울 게 뭐가 있어요? 내가 고맙지!


~~~ 그래도 바다에서 전화했잖아. 바다에서 전화해줘서 고마워.


 


 당신은 과연 얼마나 더 내 곁에 머무를 수 있을까. 당신이 내 곁을 떠나면 나는 얼마나 망가질까. 들어왔다 나가는 물 덩어리 속에 돌아다니는 모래처럼 또 가만히 가라앉아서 헤드셋을 머리에 걸쳐본다. 그러다가 가만, 더 좋아하는 소리가 있는데 이걸 왜 꼈지? 생각하고는 다시 입으로 웅얼거려본다. 바다에서 전화해줘서 고마워.




 바다에서 전화해줘서 고마워. 당신이 좋아하는 소주잔을 들어 올리는 손목이 유난히 앙상해 보인 날이 있었다.


 


 바다에서 전화해줘서 고마워. “한 우물을 파야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야. 우리 동갑내기도 멋지지만, 더 존경받아야지. 교장선생님처럼.”


 


 바다에서 전화해줘서 고마워. 당신이 바지에 실례를 하고 혼자 화장실에서 조용히 샤워기로 문질 거리는 날이 있었다. 혼자 조용히 화장실로 걸어가는 순간 당신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할아버지 원래 사람은 다 아기가 되는 거라잖아. 지금도 귀여운데 더 귀여워지면 어쩌려고요? 다음부터는 나한테 몰래 귓속말해줘.” 느리게 말하며 당신의 손을 잡아 주었던 날이었다.


 


 바다에서 전화해줘서 고마워. 세일러문 티셔츠에 내 이름을 새겨 선물해주었던 날이 있었다. 아빠한테는 이렇게 해 준 적이 없었다며, 우리 공주님한테는 이 할아비가 해줄 수 있는 건 다 해주고 싶다고 했었다.


 


 바다에서 전화해줘서 고마워. 당신의 거실에 놓인 액자에는 내 사진이 주르륵 담겨있다. 단 한 번도 먼지가 쌓여있던 적이 없었다. 액자를 구경하다가 그 옆에 꾸기 하게 놓인 공책으로 시선이 옮겨졌다. 지난 시절 당신 스스로를 원망하고 자책하는 아픈 말들이 가득한 종이 뭉치였다. 괜히 반짝거리는 액자를 다시 한 번 보고 공책을 덮었다. 베란다에서 흰 연기를 뻐끔거리는 당신의 앙상한 등으로 시선이 다시 한 번 옮겨졌다. 그런 당신의 손을 꼭 잡으며 담배 줄이라고 툴툴거리던 날이 있었다.


 


 바다에서 전화해줘서 고마워. 당신이 나를 아껴준 세월이 거듭된 덕분에 내가 바다에 올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바다에서 전화해줘서 고마워. 당신은 언제 바다에 마지막으로 왔었을까. 아이고, 바다에서 전화해줘서 고맙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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