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멸의 지슬+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
어떤 사실을 기억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잊는다고 표현한다. 사람과 사람이 헤어질 때 이별 또는 작별이라는 말을 고르기도 하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말에는 의지가 담겨있다. 순박했던 사람들이 그저 잊힌다는 게 마음 아파, 이 의지를 불어넣어 주어 작별이라는 단어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원하지 않는 끝을 마주했던 사람들이기에.
영화 '지슬'은 흑백 설정으로 오히려 색이 없으니 표정과 소리에 더 집중하며 볼 수 있었다. 그만큼 더 잔인하게 느껴져 영화를 멈추고 눈을 감아버리고 싶었던 장면이 한 둘이 아니다. 마지막 즈음 엄마 품에 안겨있지만, 죽은 엄마의 차가운 품에 안긴 아기의 모습이 애처로운 것처럼. 인선이 없는 인선의 공간에서 죽은 아미가, 본인들의 터이지만 정작 그들이 설 공간이 없어져버린 제주에서 발버둥 치다 기어코 생명의 끈을 놓쳐버린 사람들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생명에서 온기가 사라지는 순간에는 허망함과 동시에 뜨거운 슬픔이 몰려온다. 난생처음 보는 사람의 죽음이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호흡조차도 '껍데기에서 몸을 꺼내 칼날 위를 전진하는 달팽이(p.12)'가 된 것 마냥 몸을 움츠리게 한다. 또한 그 순간을 지켜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셀 수 없이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영화를 보고 책을 읽는 내내 감정이 너덜거렸던 순간들이 떠올라 끝까지 보고 읽기까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작가가 장면을 그려내는 방식이 아주 자세하고 실감 나는 덕에 계속 미간이 찌푸려지고 마음이 아리다. 동굴의 어둠 속에서 '속솜허라'며 아버지가 자꾸 손을 잡아주었다며 회상하던 소년(p.159), 손가락에 상처를 내어 피를 많이 흘린 동생이 옴죽옴죽 피를 빨아먹게 했던 인선의 엄마(p.251), 손가락 감각이 죽지 않게 바늘로 계속 피를 내던 인선을 떠올리면. 아마의 몸이 차가워진 걸 느끼고 경하가'시고 끈적이는 눈물이 다시 솟아 상처에 엉긴다(p.152)' 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