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적서를 버려라

by 인디에이전트

견적(見積).

한자를 풀면 '볼 견(見), 쌓을 적(積)'. 눈으로 보고 쌓아 계산한다는 뜻이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 단어의 실제 어원은 일본어 '미츠모리(見積もり)'다. 뜻은 '어림', '눈대중'. 견적서(見積書) 역시 '미츠모리쇼(見積書)'의 번역이다.

결국 한자를 뜯어봐도, 어원을 추적해 봐도, 견적서란 '대충 짐작한 문서'라는 의미를 안고 있다.


반면 관급공사 - 나랏돈이 쓰이는 공사 - 에서는 '어림'이 허용되지 않는다. 설계내역서로 시작하고, 공사가 끝나면 '준공내역서'를 작성하여 정산한다. 설계에 반영된 수량이 실제로 다 투입되었는지 확인하고, 그렇지 않으면 그만큼 공제한다. 물가변동이나 유가상승이 크면 설계변경이라는 공식 절차를 밟는다.

공공의 돈이니까 그렇게 한다.


그런데 민간 인테리어에서는?

눈대중으로 시작해서, 눈대중으로 끝난다. 준공 정산 같은 건 없다. 견적서에 적힌 수량과 실제 투입 수량이 다른지 확인하는 사람도 없다. 고객은 처음에 받은 그 '어림' 문서에 도장을 찍고, 끝날 때까지 그 숫자를 믿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에이전트 시스템에서는 견적서를 쓰지 않는다. 대신 '실행내역서'를 쓴다.

어림이 아니라 설계다. 고객과 에이전트가 최종디자인시안 앞에 함께 앉아서, 공정별로, 자재별로, 하나하나 쌓아 올리는 문서. 이 차이가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실은 인테리어를 소비하는 방식 전체가 바뀌는 출발점이다.


34평 아파트 한 채를 올수리 한다고 가정해 보겠다.

기존 방식부터 보자. 고객은 업체 서너 곳에 연락한다. 각 업체는 현장 실측을 하고 며칠 뒤 견적서를 보내온다. 한 곳은 5,500만 원, 한 곳은 6,800만 원, 한 곳은 8,000만 원. 세 장의 견적서는 형식도 다르고, 항목 분류도 다르고, 포함된 범위도 다르다. 비교 자체가 어렵다.

5,500만 원이 싸 보이지만, 그 안에 철거나 창호 교체가 빠져 있을 수 있다. 8,000만 원이 비싸 보이지만, 포세린 타일과 제작 가구와 구조 변경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고객은 숫자만 보고 선택하게 되고, 공사가 시작되면 "이건 별도입니다"라는 말을 듣게 된다.

이것이 '견적'의 세계다. 어림으로 시작하니 어림으로 끝난다.


에이전트와 함께하면 이 흐름이 달라진다.

고객은 현장관리 에이전트를 만난다. 어떤 공간을 원하는지, 예산은 어느 정도인지, 입주일은 언제인지.

에이전트는 현장을 본다. 벽체 상태, 배관 노후도, 창호 상태, 환기 조건. 수백 개의 현장을 거친 사람이면 보이지 않는 변수의 80%는 읽어낸다.


디자인설계가 필요하다. 현장관리 에이전트가 디자인설계까지 다 하라는 게 아니다.

고객과 함께 최적의 인테리어디자인 전문가를 찾는다.

기존 인테리어업체의 디자인팀일 수도 있고, 독립 디자이너일 수도 있다. 핵심은 디자인설계비를 별도의 용역으로, 정당하게 지급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불편한 진실을 꺼내야 한다.

건축에서는 설계비가 당연하다. 건축사사무소에 설계를 의뢰하면 별도의 설계비를 지급하는 것이 법적으로도, 관행적으로도 정립되어 있다. 건축물의 설계는 엄연한 전문 용역이라는 인식이 있다. 물론 우리는 건축 설계비에 인색해 온 게 사실이다. "도면 좀 그려주는 건데 뭘 그렇게 많이 받아"라는 인식이 여전히 존재하고, 설계 대가 기준이 있음에도 실제로는 덤핑이 빈번하다. 건축도 이런데, 인테리어는 더했다.


인테리어 디자인설계는 오랫동안 '무상 서비스'로 취급받아 왔다. 업체에 상담을 가면 3D 시안까지 뽑아주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소비되었다.


그 비용은 어디서 나왔는가. 업체가 자재 단가를 올리거나 시공비를 부풀려서 녹여 넣어야만 했다. 디자이너의 가치에 대한 대가가 견적서 안에 숨어 있었을 뿐, 공짜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에이전트 시스템에서 인테리어디자이너는 비로소 자기 역량의 대가를 당당히 받을 수 있게 된다. 현장관리만큼이나 공간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디자인설계의 가치가 독립된 용역으로 인정받는 것이다. 동시에 고객도 인식을 바꿔야 한다. 디자인은 공짜가 아니다. 내 공간을 설계하는 전문가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 그것이 오히려 보이지 않는 비용을 줄이는 첫걸음이 된다.


설계가 나오면 에이전트가 움직인다. 철거, 설비, 전기, 목공, 타일, 필름, 도배, 마루. 각 공정의 시공팀에게 연락한다. 이 사람들은 에이전트가 수년간 함께 현장을 해온 사람들이다. 전화 한 통이면 일정이 잡히고, 단가는 업체 간 거래가격이 적용된다.


반셀프 고객이 직접 연락했을 때 20~30% 붙던 리스크 프리미엄이 여기서 빠진다.


자재는 고객이 직접 구매할 수 있다. 에이전트가 사양을 잡아 준다. 세계 어디를 봐도 한국만큼 온라인 쇼핑 인프라와 택배 시스템이 잘 되어 있는 나라가 없다. 포세린 타일부터 조명, 수전까지 클릭 몇 번이면 현장 앞에 도착한다. 이 시스템을 활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기존업체 견적서에 보이지 않게 올라가 있던 자재 마진은 더 이상 없다.


미국에서는 Home Depot이나 Lowe's 같은 대형 자재 매장에서 인테리어소비자가 직접 자재를 고르고 구매하는 것이 일상이다. 인테리어공사의 자재 선택권이 소비자에게 있다는 전제가 시장에 깔려 있다.(자기 주도적 임) 최근 한국에도 이런 대형 자재매장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쿠팡, 네이버쇼핑, 전문 자재 공급처의 E-commerce 매출 또한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소비자가 자재를 직접 선택하고 구매할 수 있는 환경은 이미 갖춰져 있는 셈이다.


물론 고객이 자재를 일일이 다 구매하는 건 번거로울 수 있다. 에이전트는 고객의 확인을 받아 구매를 대행하기도 한다. 보통의 소비자가 자주 구매 하지 않는 기초공사 품목, 특히 타일, 목재 같은 품목은 에이전트가 수급처와의 거래 관계를 통해 개인 구매보다 유리한 조건으로 확보할 수 있다.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는 영역에서는 에이전트의 네트워크가 곧 고객의 비용절감이 된다.


시공팀의 관리와 보증은 에이전트가 맡는다. 고객이 단종업체 하나하나와 개별 계약을 하는 구조가 아니다. 그건 번거롭기도 하고, 한국의 현장 문화에서는 오히려 신뢰를 깨뜨리는 방식이 될 수 있다.


에이전트가 고객을 대리하여 시공팀을 섭외하고, 일정을 조율하고, 시공 품질을 검수하고, 하자를 관리한다. 그것이 에이전팅의 본질이다. 고객이 현장에서 목수와 단가를 흥정하는 것이 아니라, 에이전트가 프로의 관계망 안에서 처리하는 것이다. 지급은 공정 완료 후 에이전트의 검수를 거쳐 고객이 직접 한다.

기존의 인테리어업체를 경유하지 않으니 시공비가 떼이거나 지연될 구조적 이유가 없다.


공사 기간 내내 에이전트는 현장에 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공정 전환 시점마다 반드시. 목수가 석고보드를 치기 전에 전기 배선이 제대로 들어갔는지. 타일을 붙이기 전에 방수층의 건조가 충분한지. 도배 전에 퍼티 면이 고른지. 이 판단들은 화면 너머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15화 견적서를 버려라 커버이미지.png


'실행내역서'.

견적서가 업체의 이윤 구조를 감추는 문서였다면, 내역서는 고객의 돈이 어디에 얼마나 쓰이는지를 낱낱이 보여주는 문서다. 디자인설계비 얼마, 철거비 얼마, 목공 인건비 얼마, 타일 자재비 얼마, 에이전트 관리비 얼마. 숨을 곳이 없다. 숨길 이유도 없다.

34평 올수리를 기존 방식으로 하면 6,000만 원 이상이 드는 것이 현재 시장의 현실이다. 견적서의 금액에는 업체의 고정비와 이윤, 자재 마진, 보이지 않는 설계비가 포함되어 있다.


같은 사양, 같은 자재, 같은 시공팀으로 에이전트 시스템을 적용하면 어떻게 되는가?

업체라는 조직의 무거운 고정비가 빠진다. 자재의 중간 마진이 빠진다. 설계비가 투명하게 분리된다.

대신 에이전트의 현장관리 용역비가 들어간다. 이 현장관리용역비는 업체가 가져가던 이윤에 비하면 훨씬 가볍다.

정확한 절감 비율은 현장마다 다르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원천 제거 할 수 있는 비용이 명확하기 때문에, 절감의 방향은 변하지 않는다.


이 구조는 그림으로 보면 단순하다. 고객이 현장관리 에이전트를 만나고, 디자인설계를 의뢰하고, 시공팀이 투입되고, 완공된다. 누구나 그릴 수 있는 흐름도다.


하지만 실행은 다른 문제다.

에이전트가 B2B 단가로 시공팀을 수급하려면, 그 시공팀과 수년간 현장을 함께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목수에게 전화 한 통으로 일정을 잡을 수 있는 사이가 되려면, 그 목수의 작업 패턴과 강점등의 한계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타일팀의 평활도가 어느 수준인지, 도배사가 각각의 현장 컨디션에서 어떤 대응을 하는지, 설비업자가 배수 구배를 잡는 방식이 믿을 만한지. 이런 것들은 플랫폼을 만든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다.

현장에서 쌓이는 것이다.


수천 일의 현장이 만들어낸 관계와 판단력. 이것이 이 시스템의 엔진이다. 구조를 베끼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 엔진은 복제할 수 없다.


이 구조에서 각자에게 무엇이 달라지는가.

고객,

공사에 투입되는 돈의 흐름이 보인다. 내 돈이 어디에 쓰이는지 안다. 그리고 현장에 묶이지 않는다. 에이전트가 대신 판단하고 관리하니까. 맞벌이 부부가 한 달간 반차를 쓰며 현장에 다닐 필요가 없다. 해외에 있어도 공사가 돌아간다.


인테리어에이전트, 더 이상 업체 사장의 이윤을 채워주는 '현장소장'이 아니다. 고객의 세이브가 곧 내 실력의 증명이 되고, 완성된 공간이 퍼스널브랜드의 포트폴리오가 된다. 급여의 천장이 아니라 시장의 크기가 내 보수를 결정한다.


단종업체 시공팀, 시공비를 떼일 이유가 구조적으로 없다. 기존 인테리어업체의 부실화로 돈을 못 받던 악몽이 사라진다. 일한 만큼 받는 구조가 비로소 작동한다.


인테리어디자이너, 자기 역량의 대가를 당당히 받는다. 공간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디자인설계가 '무상 서비스'가 아니라 독립된 전문 용역으로 가치실현을 한다.


이해관계가 정렬된 구조.


에이전트가 잘해야 고객이 만족하고, 고객이 만족해야 에이전트의 평판이 올라가고, 시공팀은 제때 받으니 좋은 작업을 하고, 좋은 작업이 좋은 결과를 만들고, 좋은 결과가 다시 에이전트를 부른다. 모두가 같은 방향을 향한다.


기존 구조에서는 이게 불가능했다.
업체의 이익은 비용을 올리는 방향이었고, 시공팀의 이익은 빨리 끝내는 방향이었고, 고객의 이익은 최대한 깎는 방향이었다. 세 사람이 각기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이 구조가 완벽하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에이전트의 역량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다. 경험이 부족한 에이전트가 현장을 맡으면 기존 업체보다 못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그래서 에이전시의 교육이 필요하고, 검증이 필요하고, 평판 시스템이 필요하다.

구조가 바뀌면 확률이 바뀐다.

이해관계가 정렬된 구조에서 나쁜 결과가 나올 확률과, 이해관계가 어긋난 구조에서 좋은 결과가 나올 확률. 어느 쪽에 걸겠는가?


내가 인테리어업을 시작했던 2000년대 초반, 서른 초반의 나는 싼 견적을 무기로 현장에 뛰어들었다. 남는 것도 없는 저가공사. 그때는 싼 게 경쟁력이었다.


24년이 지난 지금, 나는 견적서 자체를 버리자고 말하고 있다.


어림으로 시작하는 시대는 끝나야 한다.

고객과 전문가가 한 테이블에 앉아, 한 줄 한 줄 함께 쌓아 올리는 예산서.

그것이 이 산업의 새로운 문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제 그 테이블의 한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당신의 인테리어에이전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