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적서를 작성하며

by 인디에이전트

우리나라는 OECD 가입국이다. 38개국 중 GDP규모 21위, 삶의 만족도는 34위다.

생산성을 보면 제조업은 상위지만 의외로 노동생산성은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세계에서 가장 성실한 민족이자 "빨리빨리"의 나라, 뜨거운 커피를 빨리 마시지 못하는 게 싫어서 "얼죽아"를 마시는 나라 다.

그런데 왜 노동생산성은 하위권에 랭크되어 있을까

어딘가 구조적으로 비효율적인 요소들이 깔려 있는 것이다.


나는 견적서를 작성하며 이 비효율을 가장 가까이에서 마주해 왔다. 견적서는 단순한 가격표가 아니다.

제안서와 도면을 바탕으로 공사의 규격과 사양을 풀어내 고객을 설득하는 하나의 ‘편지’다.


보통 5천만 원대 아파트 인테리어 공사에서 업체가 지속 가능하려면 1천만 원에서 1천5백만 원 정도의 이윤은 남아야 한다.(물론 업체마다 다르다) 한 건의 계약이 완공되기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일 처리 과정은 오히려 본공사보다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견적서에 ‘이 공사의 이윤은 1,500만 원입니다’라고 적을 수 있을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하다.


고객에게 경제적인 설득력을 잃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고객은 업체가 1천만 원이 훌쩍 넘는 이윤을 가져가는 데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다.

OECD 국가의 소비자는 효율과 합리성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결국 계약은 더 적은 이윤을 취하는 업체로 흘러간다.


짜임새 있게 산출된 견적서에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원가 계산서가 있고, 자재·시공·경비 단가가 분리되어 표기된 내역서라면 3D 이미지가 없어도 적용된 자재만으로 완성된 공간의 모습을 어느 정도 그려볼 수 있다.

“한 2천은 남겠네.”

“이건 거의 남는 게 없겠다.”

업계 경력을 갖춘 공무전문가라면 그 견적서를 만든 업체의 이윤 구조도 대략 가늠할 수 있다.


금액이 높은 견적서의 경우 대부분 수입 자재나 등급이 높은 가구 품목의 비중이 크다. 사양과 규격은 상세히 명시돼 있다.

공사비를 낮추려면 자재 배치가 달라질 수밖에 없고, 그만큼 마감의 완성도는 떨어질 수 있다.

대부분의 원재료를 수입에 의존하는 국내 건축 자재 시장은 환율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우리나라 인테리어비용은 2025년 기준 LA일부도시보다 20~30% 높은 수준이라는 통계도 있다. 이런 고물가 시대에 아무리 똑똑한 인공지능이라도 고급 자재를 싸게 사는 방법까지는 아직 제시하지 못한다.


한편, 고객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견적단위는 포괄적 산출인 '1식’이다. 주방 공사 1식 300만 원. 간단해 보이고, 저렴해 보인다. 복잡한 용어도 없다. 하지만 그 한 글자 뒤에는 수많은 해석의 여지가 숨어 있다.

세부 사양이 기재(확정)되지 않았기에 공사가 시작되면 고객이 기대했던 그 레퍼런스 이미지는 사라지고 '노멀'한 사양이 대신한다.

두루뭉술한 견적서로 시작한 공사는 끝에 가서 반드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오래전 편지지 배경에 적혀 있던 짧은 영시처럼.


Love is Game.

Easy to start,

Hard to finish.


싸고 좋은 건 없다고 본다.

있다면 당신의 안목? 에 감사해야 한다.

저가로 포장된 견적서는 결국 현장에서 부메랑처럼 그 대가가 돌아오기 마련이다.


현장은 언제나 변수와의 싸움이다. 벽지를 뜯기 전까진 그 속에 곰팡이가 얼마나 피었는지, 마루재를 걷어내기 전까진 미장층이 얼마나 깨져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성은 비용의 간극을 만들고, 그 과정에서 고객과 업체는 길을 잃기 십상이다.


모니터 한켠에서는 최저가 견적과 프리미엄 디자인을 외치는 디지털 광고들이 그 욕망을 값싸게 해결할 수 있다고 부추긴다.

어떻게든 이 행위로 돈을 벌어야 하는 공급자의 현실과 호갱님이 되지 않으려는 소비자의 기대감. 이 온도 차가 바로 인테리어 프로젝트의 출발점이다.


모든 사업과 마찬가지로 인테리어업체도 매달 발생되는 고정비용이 있다.

사무실임대료, 직원의 급여, 마케팅비, 운영비, 업무비, 면허유지비, 4대 보험까지.

인테리어업체도 충분하지는 않아도 한 현장에서 최소한의 이윤을 확보해야 사업을 지속할 수 있다.

특히, 인터넷 마케팅비용은 모든 전문업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계약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도 제안서와 기본 도면, 3D 구현에 드는 시간과 비용은 발생한다. 하지만 이런 설계비는 유명 디자인 업체가 아닌 이상 견적서에 명시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설계와 시공이 명확히 분리된 건축과 달리, 인테리어에서는 이 비용을 ‘응당 제공받는 서비스’로 인식해 온 관행이 오래됐다.

그 결과 업체는 그 비용을 자재와 시공 단가에 나눠 얹는다. 그러나 단가를 올리면 가격 경쟁에서 밀린다.


우리는 네이버와 카카오, AI의 시대에 살고 있다.

자재 구매에 있어 업체와 고객의 정보 비대칭은 이미 상당 부분 해소됐다.




김 대리는 새벽 6시에 집을 나서 7시에 현장에 도착한다.

시공자들이 오후 5시 전에 철수한 뒤에도 현장은 끝나지 않는다. 폐기물 정리, 청소, 양생 확인, 다음 공정 자재 입고 와 로스율 체크까지. 공정에 쫓기다 보면 토요일과 일요일도 현장으로 나와야 한다.

김 대리는 일을 멈출 수 없다.

월급은 280만 원 남짓.
대출, 생활비, 보험료, 차량 할부와 카드값을 제하면 여유는 없다.


타일 공정의 박 사장도 마찬가지다.

3일간의 작업을 마쳤지만 이전 현장들에서 받을 시공비 500만 원이 넘게 미수로 남아 있다.

지급은 한 달 넘게 미뤄지고 있다. 거래를 끊으면 일거리가 줄어든다.

이 현장의 시공비는 또 언제 받을 수 있을까?

오늘도 박사장은 걸쭉한 트로트를 틀어 놓은 채 시름을 감춰 놓는다.


지금,
우리 인테리어 산업은 제대로 공급하고 제대로 소비하고 있는 걸까.

이 비효율적인 구조를 정리할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만약 그 구조를 개선할 수 있다면,

테리어 디자인 업체도,
현장소장 김 대리도,
타일 박 사장도,
그리고 인테리어 고객도
모두 조금은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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