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으로서의 인테리어

by 인디에이전트

한 달에 상가와 아파트 현장 네 곳을 동시에 치기도 했다. 강행군이었다.

철거부터 필름, 금속창호, 간판, 건축폐기물처리까지 할 수 있는 공정은 모두 직영처리 했다. 타 업체에 비해 실행비는 낮아졌고, 수익률은 상대적으로 높았다.

일이 겹치며 감당하기 벅찰 만큼 바빠진다.

소위 말하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시기였다.

체납된 세금을 정리하고, 법인을 설립하며 그렇게 몇 년을 쉼 없이 살았다.


특히 상업 공간은 아파트 공사와 달리, 완공과 동시에 불특정 다수에게 그대로 노출된다.

공사 기간에는 고객 관계자뿐 아니라 상가 주변 사람들의 경계 섞인 시선까지 함께 따라온다.

완성도가 떨어지면, 그 결과는 곧바로 시공능력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

이 평판은 향후의 일감과 업체의 신뢰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나는 얼마를 더 남기느냐 보다 항상 결과물이 어떻게 남는지를 먼저 생각했다.

완성도에 대한 압박감은 어쩔 수 없이 나 자신을 더 몰아세우는 기준이 되었다.

나는 눈길을 받는 디자이너이기보다는 이 행위 자체가 고객의 사업에 기여하는 중요도를 아는 기술자임을 증명하고 싶었다.


도면 위에 정해진듯한 레이아웃을 얹기보다, 여기서 실무를 보게 될 스태프들의 이동경로와 공간을 사용하는 소비자들의 시선, 그 공간이 갖는 온전한 목적에 더 집착한다. 조명이 배어 나오는 모서리의 틈새를 다듬고,

나는 디자인만을 파는 사람이 아니라, 그곳에 머물 누군가의 안심을 함께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점주에게는 실제로 돈을 버는 수단이 되길 바라는 관점으로 공사를 했다.

고객이 잘돼야, 나 역시 먹고살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시작됐다.

한 고객과의 분쟁이었다. 견적서에 협의된 지정규격 품목을, 공사 도중 몇 배로 비싼 사양으로 바꿔주길 요구받았다. 변경할 부분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러나 고객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채 대화를 단절했다. 더 이상의 소통이 어려워졌고, 나는 공사를 중단했다.

착수금은 이미 진행된 공사의 기성금으로 대체하고, 계약을 종료하는 방향으로 협의를 진행했다.


이후의 과정은 집요했다. 손해배상 청구가 이어졌고, 분쟁조정위원회의 조정 권고도 내려졌다.
“사회적 갈등을 줄이기 위해…”, 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사안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원칙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수개월이 지나 1심 판결이 나왔다. 피고 부분승소였다. 착수금은 공사 기성금으로 현장에 집행된 금액으로 인정되었지만, 그중 일부는 반환하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법률대리인은 상호 간의 소모를 줄이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라고 조언했고,

나 역시 소액 재판의 법리가 결국 ‘판단’보다는 ‘조정’에 가깝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은 있었지만, 나는 법원의 결정을 수용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내가 운영하던 법인은 건설산업기본법 위반으로 신고되었고, 개점 이후 사업자 등록이 완료되면 발행하기로 했던 세금계산서 미발행 건을 문제 삼아 국세청에 제보가 들어갔다.


그리고 세무조사가 시작됐다.


맑은 정신으로 대처하기 위해 사흘 동안 술을 마시지 않았다. 기억으로는 이 일을 시작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자신을 잠시 칭찬해 주고 싶었다.

웃음이 나왔다.
이 상황에서도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법인과 개인사업자를 오가며 5년 치 매출을 소명해야 하는 지옥 같은 1년이 흘렀다. 다행히도 큰 문제들은 피할 수 있었다. 역경 끝에 분명 작은 승리였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마음속에 하나의 감정이 조용히 자라기 시작했다.


'지겨움'.


"나는 뭐든 그리 오래 진득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비 오는 날이면 서울과 일산에서 종합건설업을 하는 친구에게 전화가 온다.
“비 오는데, 한잔 안 하고 뭐 해.”
인테리어는 비가 와도 실내에서 작업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들 하지만 내게는 때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현장에 묶여 지내야 하는 감옥의 죄수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10여 년을 내부현장의 먼지와 소음 속에서 맡은 일에 대한 책임의 무게와 돈 사이를 오가며 살았다.

내게 인테리어는 '돈 많은 여자와 원치 않는 연애를 하는 기분'처럼 공허함이 있었다.


그때서야 비로소,
‘인테리어에게 묻던 진심’에 대한 답이 산맥의 능선처럼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공격에 나름대로 대응하고 난 뒤에는,
차라리 먼저 손실을 감수하는 편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감정에 치우치게 마련이라는 것을.


피소와 건산법 문제, 국세청 대응까지 이어진 일련의 과정은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무너지지는 않았다.

뜻밖에 그 과정에서 세법과 회계 전반에 대해 많이 배우게 됐다. 하지만 기쁨은 없었다.

몸과 마음이 삼 년은 늙어진 기분이었다.

일이 두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다시 산으로 향했다.

지난 10여 년간 손에서 놓고 있던 암벽과 빙벽등반을 다시 시작했다.

그리고, 동시에
사업의 방향에도 전환이 필요했다.


외부 공사,


'익스테리어'로 눈을 돌린다.



기술인력을 채용하고, '도장. 습식방수. 석공사업' 전문건설업 면허를 취득했다.

건축물 외부의 거친 콘크리트 면에 단열재를 반듯하게 세워 붙이고 매끈한 마감재로 마무리하는 일은

내게 또 다른 매력으로 다가왔다. 외부 마감은 내부 공사보다 덜 예민할 거라 생각했다.

예상은 빗나갔다.


신축 건물의 콘크리트 외벽에 새로운 표면을 입히는 일은 인테리어 못지않은 까다로운 일련의 과정이 필요했다. 눈비에 노출되는 양생조건은 운도 따라줘야 했고 숙련된 '손'을 요하는 일이었다. 스타코 현장을 많이 보긴 했지만, 내가 직접 시공을 할 줄 알아야 정확한 품셈으로 견적을 산출할 수 있을 거고 시공관리를 할 수 있다.


비계*를 타고 미장칼을 잡았다. 몸으로 부딪히며 공정의 순서와 '흙손'의 감각을 익혔다.

시행착오는 기공들과 함께 수습해 나갔고, 그런 과정으로 자연스럽게 미장의 세계에 들어서게 된다.

그 대가로 나는 내 전담 시공팀에 더 많은 현장을 연결해 주기도 했다.

작업물을 망치더라도 '처음부터 기술공처럼 난이도 있는 일에 붙어 봐야 실력이 는다'

이것이 내가 추구하는 체득방식이었다.


아파트 도색과 고층 방수공사 현장에서는, 번거롭다는 이유로 안전장비를 소홀히 하는 작업자들을 종종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외벽 로프 작업은 단 한 번의 실수가 치명적이다.
그래서 나는 이 공정만큼은 유독 신경을 쓴다. 기본 장비만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내 개인 등반 장비를 동원해 추가적인 백업 라인을 설치한다. 높은 곳에 매달려 일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작업자보다 지켜보는 사람이 더 불안해진다. 저 사람은 떨어지면 죽는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나 또한 망한다.

그건 누구에게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다.

이것은 비단 사업적 손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삶이 통째로 사라지는 비극이 내 현장에서 일어나는 것, 그것은 절대로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내 현장의 철칙은 분명하다.


금전 제삼(第三),

애정 제이(第二),

안전 제일(第一)이다.


신축 건물의 외부 마감이 진행되는 시기는 내부공사와 맞물려, 인테리어 공사로 이어지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익스테리어 분야로의 진출은 인테리어 공사 수주에도 도움이 됐다.


외부 공정은 위험을 동반하는 경우가 많아 작업자 평균 연령은 대체로 60대가 많았는데, 상대적으로 젊은 나이라는 점은 업계 선배들에게 우호적인 인상으로 받아들여졌다.

감사하게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


내친김에 조경 자격증과 굴착기 자격증을 취득했다. '지반조성. 포장공사업' 전문건설업 면허를 추가하며, 토목 공사까지 사업 영역을 넓혔다. 고소 장비 접근이 어려운 위험목* 제거 작업에는 로프를 이용한 트리클라이밍 기술과 분절 제거 기법을 적용해 수목 관리 분야도 직접 실행하게 된다.


고소작업이 많은 외부현장은 늘 추락사고 위험을 수반했다.


“암벽을 타다 죽으면 좋아하는 거 하다 간 사람이 되지만,
공사 현장에서 추락하면 그저 돈 벌다 죽은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았다.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기초체력이 있어야 위험한 순간에 살아남을 수 있을 거 아닌가.

어쨌든 그 차이가 나를 다시 산으로 이끌었는지도 모른다.


이후 3년 동안은 주말마다 장비를 챙겨 설악산을 비롯해 여러 암벽에 붙어살았다.

운동 삼아 다니던 실내 암장에서 고산등반 원정팀에 합류하게 되었는데, 해외 등반 자체에 대한 욕심보다는, 내 본업과 맞닿아 있는 유럽의 건축 환경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마음을 끌었는지도 모른다.

2019년 여름. 러시아를 거쳐 스위스·프랑스·이탈리아로 이어지는 한 달간의 알프스 원정을 떠났다. 몽블랑과 마터호른을 올랐고, 유럽의 주요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치마그란데(2,998m) 거벽을 완등했다.

이후 유럽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담은 건축물에 대한 영감은 내가 맡았던 강릉의 리조트공사와 봉평 펜션현장의 외벽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집에서 5킬로미터 거리에 있는 ‘뮤지엄 산’을 오가며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행위’를 오래 지켜보았다. 초현실적인 감정을 자극하는 그의 건축물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공업고등학교 출신이며, 건축가가 되기 전에는 트럭 운전사와 권투선수로 일했고 건축에 대한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그의 이력은 특출했다.

작고한 내 아버지와 생년월이 같다. 그런 사소한 우연으로도 더 오래 기억에 남아 있는 인물이다.


그의 페르소나인 노출 콘크리트를 다시 보게 되었다.

파주석으로 쌓아 올린 둔탁한 질감과 우직한 중량감은 공간에 머무는 사람에게 말없이 깊은 공감을 건넨다.

그때부터 나는 외장재를 내부로 끌어들이는 공간 구성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먹고살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했고, 뭐든 담아야 했다.




그럼에도 먹고사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아직 '인테리어'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 이유를 조금은 명확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이 열악한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다음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하려 한다.







앵콜을 받은 무명가수처럼


연타를 허용한 복싱선수처럼


일 할 것


- 시 '솔직하면서 있는 그대로가 아닐 것' 중에서.



*비계 : 건설 현장에서 높은 곳의 작업 발판, 통로 등을 위해 임시로 설치하는 가설 구조물(스캐폴딩)

*위험목 : 경사면에 기울어져 벌목이 필요한 큰 나무류


이전 07화Beginner's Lu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