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응시하는 자세
여름휴가, 나는 루아르 계곡의 고성(古城) 샹보르를 찾았다. 초록빛이 짙게 번진 숲길을 따라 걷다 보니, 숲길 끝에서 하얀 석조의 윤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수없이 솟은 굴뚝과 첨탑이 하늘을 찌르듯 겹겹이 포개져 있었고, 그 복잡한 실루엣은 마치 인간이 ‘영원’이라는 단어를 건축으로 옮겨 놓은 듯했다.
성 안으로 들어서자 공기가 서늘해졌다. 여름의 열기는 돌벽 앞에서 맥을 잃었고, 오래된 돌이 품은 냉기와 습기가 피부에 얇게 내려앉았다. 관광객들의 발소리와 안내 방송이 여기저기서 뒤섞여 울렸지만, 어딘가 한 발짝만 더 들어가면 그 모든 소음이 시간 속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그날 성 안에서는 마침, 프랑스에서 ‘빛의 화가’로 불리는 김인중 신부의 스테인드글라스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전시실로 들어서자 스테인드글라스가 뿜어내는 유리의 성가(聖歌) 같은 빛이 공기부터 물들였다. 평면의 그림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색을 머금고 있는 듯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붉은색과 푸른색, 보랏빛이 서로 스며들어 새로운 층위를 만들었다. 그 색은 ‘보는 것’이라기보다 ‘잠시 그 안에 머무는 것’에 가까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작품 앞에서 잠깐 멈추었다가 사진을 찍고는 곧장 다음 공간으로 흘러갔다. 스테인드글라스가 뿜어내는 경이로움도 바쁜 동선 속에서는 금세 배경이 되는 듯했다. 그런데 그 흐름과 다른 속도로 전시실을 걷는 한 노부인이 유독 내 시선을 붙잡았다.
백발이 성성한 그녀는 허리가 굽어 있었고, 걸음도 편치 않아 보였다. 지팡이에 체중을 실어 한 발을 옮긴 뒤 숨을 고르고, 다시 또 한 발을 옮겼다. 하지만 눈에 남는 것은 느린 걸음이 아니라 작품을 바라보는 눈길이었다. 그녀는 작품마다 다른 ‘숨결’을 듣기라도 하듯, 한 점 한 점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시선은 섬세했고 태도는 경건했다. 그 경건함은 종교적 표식을 넘어, 삶을 대하는 방식처럼 보였다.
나도 어느새 그녀의 속도에 발을 맞추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빛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빛은 유리의 표면을 스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돌벽에 부딪혀 다시 반사되고, 바닥의 먼지 위에 얇게 내려앉아 공간 전체를 ‘색의 호흡’으로 바꾸고 있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작품 앞에 서 있었다. 감탄조차 소란으로 느껴질 만큼, 침묵이 더 어울리는 순간이었다.
어느새 전시실에는 그 노부인과 나, 단둘만이 남아 고요를 나누고 있었다.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이 필요 없다는 사실이 따뜻하게 닿았다. 서로의 존재를 의식하면서도 방해하지 않는 거리에서, 우리는 같은 빛을 같은 속도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예술은 침묵만으로도 서로를 이어주고 공명케 한다는 것을.
잠시 후 우리는 나란히 상영관에 앉아 김인중 신부의 삶과 예술에 대한 영상을 함께 보았다. 화면 속에서 유리와 빛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시간을 견디는 기도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작업 과정은 예술 활동을 넘어, 신앙을 빛으로 벼려내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빛이 그녀의 깊은 주름을 비추었다. 노부인은 화면이 전환될 때마다 고개를 조금씩 끄덕였고, 때때로 두 손을 모으듯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그 모습은 ‘감상’이라기보다 ‘참여’에 가까웠다. 마치 예배당 미사에 참석한 것처럼.
영상이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노부인과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는 서로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마디 대화도 없었지만, 오랜 시간 깊은 대화를 나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생의 끝자락, 예술 앞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노부인의 모습은 내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녀의 순수한 열정과 삶을 대하는 경건한 태도가 온전히 내게 전해진 까닭이리라. 삶의 모든 순간이 얼마나 눈부신 기적인지,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 증명해 보이는 듯했다.
[FULL] 在佛 화가이자 도미니크 수도회 사제인 김인중 신부의 삶과 예술 세계 | KBS 20211223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