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친절

by 홍푸앙

장을 보러 집 근처 슈퍼마켓에 갔던 어느 날을 떠올리면, 그날의 일상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계산대 앞에서 당황해하던 아이의 모습은 이상하리만큼 선명하다. 일상은 대개 기억을 남기지 않고 흘러가지만, 어떤 일상의 조각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그날의 일도 그러하였다.


계산대 앞에는 몇 명의 손님이 줄을 서 있었다. 내 앞에는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젤리 한 봉지와 샌드위치 하나, 콜라 한 캔을 들고 있었다. 물건은 많지 않았으나, 아이의 몸짓은 지나치게 조심스러웠다. 조심이라는 태도는 종종 물건을 다루는 방식보다, 시선을 견디는 방식에서 먼저 드러난다. 아이는 앞만 바라보고 있었으나, 뒤쪽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 자세에서 읽혔다.


계산원이 금액을 말하자 아이는 가방 쪽으로 손을 뻗었다가 멈추었다. 지퍼를 열고 잠시 더듬던 손끝이 허공을 몇 번 더듬고 난 뒤, 아이는 고개를 들었다. 지갑을 깜빡한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는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을 한 번 훑었다. 자신에게 쏟아질 시선들을 가늠하려는 듯했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던 물건들을 점원 쪽으로 조심스럽게 내밀었다. 구매를 포기하는 동작이 아니라, 상황을 수습하려는 동작처럼 보였다.


나는 잠깐 망설였다. 모른 척하는 쪽이 언제나 쉽기 때문이다.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그 순간은 별 문제 없이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냥 지나치면, 누군가는 혼자 남는다. 나는 함께 계산하겠다고 말했다. 아이는 급히 고개를 저으며 사양했다. 나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 뒤 결제를 했다. 젤리와 샌드위치, 콜라 한 캔은 계산대 위를 거쳐 다시 아이의 손으로 돌아갔다.


아이는 연신 감사의 말을 했다. 이상하게도 그 말이 과하게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돈에 대한 감사만이 아니라, 그 순간의 불편함에서 벗어난 것에 대한 안도감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너도 나중에 다른 사람을 도와줘.” 그 말은 그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짧은 정리였다. 나는 인사를 건네고 자리를 떠났다.


며칠 뒤, 시내에 쇼핑을 하러 가기 위해 기차역 승강장에서 열차를 기다리는데, 누군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낯선 이가 건네는 인사에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슈퍼마켓에서 만났던 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이는 시내에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열차가 들어오고 우리는 같은 칸에 올랐다. 아이는 가방에서 쿠키 한 봉지를 꺼내 내게 건넸다. 나는 사양하려 했지만, 아이의 표정을 보고 말을 삼켰다.


그것은 보답이 아니라, 스스로 균형을 맞추려는 방식처럼 느껴졌다. 나는 쿠키를 받으며 고맙다는 말을 했다. 시내로 가는 동안 우리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가 BTS의 팬이며 한국 음악과 드라마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에 대해 말하는 동안엔 눈빛이 반짝거렸다. 계산대 앞에서 당황해하던 소심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기차역 벤치에 앉아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 여성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오랜만이라고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녀가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는 오래전 슈퍼마켓에서 있었던 일을 상기시켜 주었다. 그 아이였다. 어느새 대학생이 되어 있었다. 그녀는 파리의 대학에서 한국학을 전공하고 있다며 자신의 근황을 말했다. 부모님과 함께 여름을 보내고 파리로 돌아가는 길이라고도 했다.


이런저런 대화를 이어 가던 중, 그날 계산대 앞에서 내가 자신에게 해줬던 말을 여전히 기억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 순간 당황했다. 그저 상황을 정리하려고 했던 말인데, 그녀는 그 말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잠시 후, 역사에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우리는 작별 인사를 나눴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고, 나는 승강장에서 기차가 떠나간 자리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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