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격도 급한 편이라 최대한 빨리 업무처리를 하다 보니 장거리 달리기 선수처럼 호흡이 가빠졌고 손님이 다 나가고 5시가 될 때쯤엔 녹초가 되어 책상에 엎드렸다.
왼쪽 옆을 보니 출납 대리님도 나와 같은 자세로 숨을 몰아쉬고있었다. 나만 힘든 게 아니었구나.
출근을 한 건지 태릉선수촌에 온 건지..
금융상담을 한 건지 달리기를 한 건지..
진짜 이런 우리의 모습이 재미있기도 했다.
팀장님은 이런 우리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특별히 잘 한 일도 없었는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퇴근만 하면 맥주라도 한잔 하자며 끊임없는 격려를 해주셨다.
힘든 일상 중에 나의 유일한 낙은 퇴근 후 맥주 한잔, 그리고 주말에 만나는 나의 오랜 연인.
그는 학생이고 나는 사회초년생이어서 매번 뚜벅이로 서로를 향해 달려갔고 참 애틋하고 간질간질한 사랑이었다.
같이 마주 보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서로의 시간과 마음을 나눈다는 것이 취업 전에는 당연한 일상이었지만 경제활동을 시작하니 이 또한 특별함과 설렘으로 다가왔다.
늘 지나고서야 느끼지만 내 상황과 처지에 따라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은 순간이 오고 그 순간이 되면 왜 미처 이것을 그때는 깨닫지 못했을까 후회가 되기도 한다.
10년을 넘게 만났어도 나는 항상 그에게 간절했던 것 같다. 앞으로 누구를 만나도 이런 사랑을 할 수 없으리란 확신을 해서였을까.
중학교 사춘기 시절부터 함께 성장했고 나의 힘들었던 가정생활을 어루만져주고 서로 가진 것 없이 용돈과 아르바이트로 생활했지만 자신을 위해 쓰기보다 서로에게 더 해줄 건 없었는지 생각하던 헌신적인 관계였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앞으로의 연애도 이런 연애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현재의 나는 그때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최소한 이런 부분은 갖췄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기준들이 확립되어 있는 상태라서 과거의 무조건적인 순수한 연애는 더 이상 할 수 없다.
그 부분이 슬프기도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불혹의 사랑이 사춘기 아이의 사랑과는 같을 수가 없을 테니깐..
아마 지금은 조금 더 다른 차원의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당시 내 또래의 가장 주된 고민은 취업이었기 때문에 취업에 성공한 나는 활짝 만개한 꽃송이 같은 느낌이라면 내 오랜 연인은 열심히 꿀만 나르고 있는 꿀벌 같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언제 끝나지도 모르는 인고의 시간을 참고 이겨내고 버티고 견뎌내는 -
이런 상황에서 가장 힘든 건, 이런 나의 노력이 빛을 발해서 결국 끝은 있는 건지..
한 치 앞도 모르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중심을 잡는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나 또한 그 순간들을 넘어서지 못하고 나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취업했기때문에 그의 상황을 최대한 이해하려고 했다.
사실 난 11번의 봄을 내 연인과 보내면서 이별이라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도 나처럼 취업이란 것을 하게 되면 결혼이라는 것 또한 그동안 우리가 지내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되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우린 너무나 다른 상황에 놓여있었고 그 상황들이 쉽지 않은 과정이었기 때문에 서로 날카로운 말들이 오고 갔다.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합의점을 찾지 못한 우리는 끝끝내 서로의 손을 놓아버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난 그 친구와 결혼을 원했지만 현실은 취준생이었고 용기가 나질 않았다.
분명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때는 왜 확신하지 못했을까. 이런 이별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핑곗거리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한창 사이가 좋을 땐 언제 결혼하면 좋을지 혼자 달력까지 뒤져가며 설레는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우리가 처음 사귀기로 한 날이 주말인 날을 찾아서2013년 4월 21일이 일요일이니깐 이때 결혼식을 하고.. 이쯤엔 우리 둘 다 자리도 잡고 미래를 약속할 수 있겠지?
상상만으로도 참 설레고 좋았다.
돌이켜 그 순간을 다시 되짚어보면 나에게 가장 부담이 되었던 부분은 그 친구의 막연한 미래와 불같은 성격을 가진 그의 어머니.
직접적으로 나에게 화를 내신 적은 없었지만 그가 어머니와 통화할 때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하이톤의 까랑까랑한 목소리.
결혼을 하기도 전에 시댁 또한 중요하다는 얘기를
어렴풋이 듣고는 내가 감당하기에 힘들 것 같다는 결론을 지었다.
결혼을 하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던 이유 모두를 합쳐도 그 사람 자체의 가치가 훨씬 컸었는데 그 부분을 간과했다.
난 보통의 여자들과 다르고 좀 더 특별하다고 스스로를 여겼지만 결국 이것저것 따지고 이별을 선택한 이기적인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11년의 시간 동안 우리에겐 참 많은 추억이 있다.
중학교시절, 언젠가 땅만 보며 걷고 있었는데 전화가 와선 "유나야, 넘어지겠다. 앞 좀 보고 걸어."
놀라서 고개를 들어보니 저 멀리서 나를 보고 있던 그 사람.
밸런타인데이에 자기 몸 만한 하얀 곰돌이 인형을 우리 집 앞까지 들고 와 쑥스러운 표정으로 전해주기도 했고, 학을 수백 개 접어서 유리병에 담아 선물해 주기도 했다.
내 키만 한 큰 곰인형을 받아서 좋았다기보다 이걸 어떻게 들고 왔을지.. 내성적인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였다고 생각한다.
그 노력이 참 고맙고 예뻤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우리는 모두가 잠든 밤에 서로에게 전화를 걸고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휴대폰만 들고 귀가 뜨거워질 정도로 몇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좋아하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던 나는 쉬는 시간마다 괜히 그 아이 교실에 가서 다른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척하며 그 아이를 슬쩍슬쩍 보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서로 다른 학교에 진학했고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던 우리는 문자와 전화로 매일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래도 정말 다행인 건 그 아이가 나와 같은 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 야자가 끝나고 한 번씩 단지 내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거다.
그 잠깐의 시간 동안 서로 마주 보고 얘기하고 가끔은 이런 상황들이 힘들어서 울기도 했다.
얼른 대학에 가서 성인이 되기만을 기다리자고 약속하며.. 그 아이는 그런 나를 다독여줬다.
수능만 치면 모든 게 해결될 줄 알았는데 우리 둘 모두 대학을 다시 가야 하는 상황에 놓여 또 그렇게 시간이 1년 지나갔다.
한 번에 좀 쉽게 됐으면 참 편했을 텐데..
그리고 기쁨의 순간도 잠시 그 친구는 약제병으로 군대에 갔다. 난 고속버스를 타고 그 아이를 보러 강원도에 갔고 볼 수 없을 때는 편지를 써서 부대에 부치기도 했다. 한 번씩 강원도에서 걸려온 콜렉트콜 전화가 내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 되곤 했다.
요즘 연인들이 하는 연애처럼 해외여행이나 호캉스 등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내 연인과 함께했던 공기 같은 순간들이 내 피부에 온전히 스며들어 아직도 그때의 감정들이 떠오르곤 한다.
오랜 연애의 끝이 너일 줄 알았지만 지금에서도 너무나 감사한 건 11년의 시간 동안 충분히 사랑했고 한결같은 사랑을 온전히 받을 수 있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