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혼할 수 있을까
1화 . 참 아이러니하다. 인생도 타이밍도
공포영화를 보고 잠든 것도 아닌데 요며칠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꾼다. 아무도 없는 칠흙 같은 어둠 속을 반복해서 달리는 꿈. 키 큰 나무들이 하늘을 덮어 별을 쫓아 길을 찾는 것도, 손에 든 나침반도 어두워 어디가 동쪽이고 서쪽인지조차 알 수가 없다.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막연한 불안감에 이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다. 이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압도하는 공포감에 휩싸여 하늘로 날아갈 것 만 같으니깐. 할 수 있는 게 이거뿐인 건가.
나란 존재가 더욱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거친 호흡을 몰아쉬며 밤새 뛰었지만 결국 내가 처음에 표시해 둔 가장 약하고 잔 나뭇가지가 찌를 것만 같은 볼품없는 나무 앞에 다시 섰다.
"아 - 진짜 왜 이래. 도대체 길이 어딘데!"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그렇게 식은땀이 배게를 축축하게 적신 뒤에야 잠에서 깼다.
" 아.. 또 같은 꿈이네.. 실제도 아닌데 다리는 왜 이렇게 아파. 하.."
몽유병이라도 걸린 건가. 이런 내가 점점 무서워지고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나의 모습이었다.
최근 수십 개의 이력서를 넣고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린 게 몇 달째. 고등학교 동창들도 그리고 대학 동기들도 하나 둘 취업 소식을 전해온다.
"아, 진짜 너무 잘됐다. 노력한 보람이 있네!
이제 우리 꽃길만 걷자. "
그런데 친구들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먹다 남은 감자를 입에 쑤셔 넣은 것 같은 답답함과 구역질 날 것 같은 이 기분은 -
과연 이 기분은 무엇이었기에 이토록 역겨웠을까
나는 누구에게든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비치길 원했던 그런 부류였다. 나의 감정은 철저히 내 가면 속에 숨긴 채 겉으로는 마스크 귀신처럼 웃고 있었다.
너무 환하게 웃어서 나 자신도 이 감정이 진심인 줄 알았던 걸까.
내 꼴이 어두운 뒷골목을 헤매고 다니는 길고양이 같은 신세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중이어서 누굴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
이제 꽃길만 걷자던 나는 정작 바닥이 뚫리기 직전인 얇은 슬리퍼만 신은채 자갈밭 길을 걷고 있었다.
참 아이러니하다. 인생도 타이밍도.
가장 먼저 취업한 건 나였지만 보란 듯이 퇴사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여유로운 척했지만 자존감은 바닥을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나의 첫 직장.
얼떨결에 대기업에 취업했고 생각지도 못한 제법 큰 액수를 첫 월급이라는 이름으로 받았다. 정규직이 뭔지 계약직이 뭔지 -
다들 그냥 이 정도 월급을 받으며 사는 건가.
어린 사회초년생에게도 세상은 참 관대하구나.
엄마 없이 아버지와 할머니의 보호아래 살아온 지난 세월들을 보상받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래, 공부를 뛰어나게 잘한 것도 아니었지만 착하게 살아왔으니깐.. 나 진짜 힘들었는데...
말도 못 하고 꾹꾹 참으며 살았단 말이야.
이제 진짜 나도 어른이야. "
집에서부터 환하게 웃고 있는 사원증을 목에 걸고 H라인 스커트와 어젯밤에 빳빳하게 다려둔 블라우스를 입고 버스를 탔다. 이른 새벽이라 나처럼 젊은 직장인보다는 노인들이 더 많아 어느 누구도 날 봐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출근하는
이 길이 커리어우먼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설레기도 했다.
하지만 그 설레는 기분은 정말 단 며칠.
찰나처럼 지나가서 나에게 이런 때가 있었나 싶기도 하다. 객장에서 소리 지르는 손님,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비웃으며 격려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비아냥대는 손님들로 하루하루가 도망치고 싶은 순간들이었다.
내가 생각한 직장인의 모습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
우연히 운 좋게 들어온 이 회사가 나에게 결코 맞지 않는 옷이었고 내 수준에 과분한 회사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원하던 일이 아니었다.
내 심장이 뛰지 않는 일이었고, 이대로 안주하다가는 매달 꽂히는 월급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게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1년도 다니지 못한 채 아버지에게 그만둔다는 말이 입이 떨어지지 않아 혼자 사직서를 쓰고 몇 달을 출근하는 척 5시에 일어났고 정확히 45분 뒤 집에서 나왔으며 퇴사 전이었다면 7시에 지점에 도착했겠지만 나의 종착지는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학교 도서관이었다.
대학교 시험기간에도 일찍 도착한 탓에 자리는 늘 있었다. 후줄근한 추리닝이 아닌 멀끔한 복장으로 매일 도서관에 공부하러 오는 나를 보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 내 모습은 마치 imf때 실직되고 집에 말도 못 한 채 길바닥을 전전긍긍하는 가장의 모습과 조금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물론 여러 명의 가족을 먹여 살려야만 했던 그 시대 아버지의 어깨에 어떻게 비하겠냐만은 -
그때의 나도 참 초조하고 불안했다.
이 거짓말이 언제까지 유효할지 가늠할 수 없었고
언제 취업이 될지도 몰랐기 때문에 매일 조린 가슴을 움켜쥐며 살았었다.
거짓말이 들키기 전에 항공사에 이직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냉혹했고 차가웠다.
내가 생각한 만큼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세상이 쉬운 줄 알았고 내편인 줄 알았는데 -
이렇게 경솔한 사람이 있었을까.
도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이 정도면 충분히 준비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전쟁터에 수류탄하나 안쪽 주머니에 겨우 챙겨 온 어수룩한 신병 같은 모습이었다.
면접을 거듭할수록 나의 존재가 점차 연기 속으로 사라져 갔다.
다른 면접자에게 던진 질문의 답을 찾느라 눈알을 굴리고 있었고 나에게도 같은 질문이길 바라며 애처로운 표정으로 쳐다봤지만 역시나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내 심장소리가 너무 크게 울려 면접장 바닥까지 흔들리는 것 같아 잠시 휘청이기도 했다.
내가 나를 이겨내지 못했던 찰나의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