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이혼할 수 있을까
2화. 아버지와 마주 앉다.
거듭되는 면접.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새벽마다 출근하는 척
거짓말로 둘러대는 나 자신도 지쳐만 갔다.
그동안 모아둔 얼마 되지도 않는 월급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스터디룸을 빌려 면접스터디를 하고..
아주 기본적인 지출을 제외하고는 조금의 여유도 부릴 수가 없었다.
돈이 바닥나는 순간 이 거짓말도 끝이 날 테니깐.
어쩌면 그 순간을 기다렸을지도 모르겠다.
내 의지로는 차마 말할 수 없으니 그냥 나란 존재가 자연스레 그 상황 위에 살포시 얹어지는 -
결국 난 3개월도 버티지 못한 채 부끄러운
내 현실을 다시 한번 직면했다.
그래도 이 순간을 아무렇지 않은 척 되려 당당하게
얘기하고 싶어서 뷰가 좋은 창가 자리를 미리 예약해 두고 아버지와 마주 앉았다.
무슨 말을 할지 미리 시나리오는 다 짜놨었는데
왜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 거지..
담담하고 명료한 말투로 간결하게 전달하고 싶었는데, 손은 덜덜 떨리고 물이 담긴 유리잔 속의 내 입꼬리는 어색하게 올라가다 못해 썩은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지금 이 표정이 항공사 면접 때 짓던 딱 그 모습이구나.
'아, 이래서 떨어졌나 보네. 떨어질만했구나..'
그동안 찾지 못했던 탈락의 원인을 비로소 찾게 되었다. 아버지 바로 앞에서.
"아, 아빠.. 사실 내가 회사를 잘 다니고 있긴 했는데.. 원래 내 꿈은 승무원이었잖아. 여기 계속 다니면 시간이 지나서 내가 후회할 것 같더라고..
그래서 그냥 그만뒀어. 사실 면접도 좀 보긴 했는데
아직은 안 됐지만 좀 더 준비하면 될 것 같아.
토익도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잘 해내볼게. "
아버지의 대답이 어떨지 당장 듣기가 무서워서
조금의 빈틈도 주지 않고 속사포 랩처럼 내 얘기만 뱉어냈다.
주저리주저리 말하긴 했지만 그래도 말을 하니
그제야 좀 살 것 같았다.
그리고 들려온 답변 "그래, 잘했다."
아버지는 내가 어릴 적부터 나의 삶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중간, 기말고사를 쳐도 몇 점을 받았는지 성적표는 언제 나오는지 그런 부분에
대해 전혀 묻질 않으셨다.
그래서 성적이 저조한 날에는 성적표 자체를 보여드리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묻지 않으셨으니깐..
성적에 아무리 관심이 없으셔도 내 딸이 이 정도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진 않았다.
내 학창 시절은 이런 패턴의 반복이었다.
다른 친구들의 부모와는 전혀 다른 모습에
한 동안은 나에게 관심 자체가 없는 건가 싶기도 했다.
내가 느낀 대한민국을 국적으로 둔 사람들의 감정은 기쁜 일엔 소극적으로 축하하고, 작은 걱정과 고민들에는 당장 내일이 없을 사람처럼 좌절하고 낙담한다.
이런 대한민국 국민의 표본.
바로 나의 친할머니. 안정숙 여사이다.
학교에서 조금이라도 늦는 날에는 하염없이 베란다에 서서 지켜봤고 10분 단위로 어디인지 위치를 파악하고, 납치라도 당하면 어쩌냐고 눈물을 흘리셨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에 지나치게 감정을 쏟았고 이내 손녀를 향한 걱정은 자기 비관으로 이어졌다.
"내가 애들을 잘못 키워서.. 그냥 내가 죽어야지."
그런 할머니와 정반대 성향을 가진 내 아버지.
그 둘이 나란히 대화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피식 났다.
선선한 가을 하늘아래 굴러가는 낙엽 같은 아버지와 한여름 땡볕에서 달리기까지 하며 짜증이란 짜증은 다 표출하는 할머니.
그 당시에는 할머니로 인한 스트레스가 너무 커서
일부러 더 늦게 집에 오기도 했고, 방문을 쾅하고 닫고 들어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내 방문 넘어 흐느끼는 할머니의 울음소리.
"에휴, 내가 죽어야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내가 여기 와서 이 짓거리를 하고 -"
그때는 그런 얘기를 듣는 것도 화가 나고 짜증이 나서 독서실에서 사용하던 주황색 귀마개로 내 귀를 막았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철없는 사춘기 여고생의 모습이었다.
아무튼, 가을 낙엽 같은 아버지가 나의 걱정과는 다르게 덤덤하게 알았다라고 말씀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했는지 -
긴 말을 하지 않아도 짧은 그 대답 속에는 나를 향한 지지와 응원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나이가 듦에 따라 조금은 알 것 같다.
가끔은 화려한 수식어구와 부연 설명보다 명료하고 간결한 그 한마디가 깊은 울림을 줄 때가 있다.
아버지는 나에게 그런 울림을 주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