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아무것도 못 하는 날도, 내가 버티는 날
요즘은 젊은 사람들부터 나이 든 사람들까지
운동도, 식단도, 외모관리도 하며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살고자 하는 노력들을 많이 하는 것 같다.
그런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난 가끔씩 내가
한심해지곤 한다. 감정이 복잡할수록 더 바쁘게
살려는 나에겐 때론 정반대의 상황이 닥쳐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이름은 바로 ‘무기력’이다.
의욕이 넘치게 살다가 한순간 아무것도 하기 싫어
가만히 천장만 바라본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게을러진 건 아닐까 생각했다.
열심히 살고 싶은데 살아지지 않는 내 모습에
큰 죄책감을 갖게 된다. 자도 자도 피곤하고 머리도
멍해지고 바보가 된 기분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마치 머릿속이 솜뭉치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생각조차 느릿느릿 흘러간다.
내 몸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스위치가 꺼진 것처럼,
움직여야 한다는 신호가 전혀 오지 않는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도, 무엇을 꺼내야 할지 몰라
다시 닫는다. 밥 먹는 것도 귀찮아서 칼로리를 대체할 알약이 나오길 바라기도 하고, 하루 종일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다 보면, 시간이 어디로 흘러갔는지도
모른 채 저녁이 된다. 저녁이 되면 불을 켜야 하는데
스위치까지 걸어가는 몇 걸음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모든 의욕이 사라지고 청소도, 밥도 하기 싫고
씻는 것도 귀찮아서 나가기는 더더욱 싫어진다.
알람을 끄고 이불속에 다시 몸을 묻을 때,
세상과의 연결이 한 줄씩 끊기는 기분이 든다.
“엄마!! 그만 좀 누워있어! 우리 밖에 나가자!”
아이의 말이 내 귀에 박히면 억지로 몸을 일으켜
밖을 나가본다. 화창한 날씨에 난 집에 가고만 싶다.
그저 이불속에 몸을 파묻고 세상을 멀리하고 싶다.
빨래를 세탁기에 돌려놓고도 널지 않아 하루가
지나버렸다.
그렇게 무기력이 찾아오면 마음이 너무 지치지만
내 성격상 집을 치우지 않으면 견디지 못해서
억지로 청소를 하고 씻고 밥을 먹는다.
삶은 왜 늘 한결같이 같은 일을 반복하며
흘러가야만 하는 걸까.
왜 무언가에 쫓기듯 열심히 살아야만 하는 걸까.
이십 대엔 조금은 다른 하루하루였던가?
뒤돌아보면, 어린 시절부터 롤러코스터 같은 인생을
살아온 나는 간절히 빨리 나이가 먹고 싶었다.
나이를 먹으면 마음이 조금은 단단해지고, 흔들림이
줄어들 거라 믿었다.
그때는 나이만 들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을 줄 알았다.
십 대엔 빨리 학교에서 벗어나 어른이 되고 싶었고,
이십 대엔 빨리 나이가 들어 안정을 찾고 싶었다.
예전에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의 한 장면에서
이런 대사가 있었다.
“전 빨리 그 나이가 됐으면 좋겠어요. 인생이 덜 힘들 거잖아요.” — 드라마 〈나의 아저씨〉(tvN, 2018),
박해영 작가
내 마음이 그 마음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의 삶은 조금 안정되었을
지언정 마음은 왜 이리도 더 요동치는지 알 수 없다.
드라마 속 내 나이 또래 그들처럼 나이가 먹어도
여전히 그 힘듦을 부인할 수가 없다.
나이 듦은 고요함을 주기는커녕,
무기력을 더 은밀하고 오래 머물게 하는지도 모른다.
힘듦의 이유와 그것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
고통은 늘 제자리다.
“아빠, 난 빨리 늙고 싶어.”
언젠가 아빠에게 내가 말했다.
“늙으면 뭐 다른 줄 아니? 마음은 똑같아.”
“내 나이에는 이것보다 더 늙었을 때의 두려움이 커.”
아빠는 나에게 이렇게 대답해 주었지만 난 여전히
늙음을 꿈꾼다. 아직도 노년의 나이가 되면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곤 한다.
쳇바퀴 돌아가는 삶, 흘러가는 시간,
하기 싫어도 해야만 하는 나의 모든 역할들.
그때쯤이면 무기력을 이겨내지 않고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한 마음이 내 안에 있다.
노년의 나이가 되면 난 지나간 무기력의 시간들을
아까워하게 될까.
헛되이 보냈다고 좀 더 열심히 살걸 그랬다고
후회하게 되려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불안하지 않은,
내 역할을 모두 내려놓고 잠시 나로 살아도 되는,
그런 날을 언젠가 기다려본다.
그날이 오면, 나는 그저 조용히 숨 쉬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채울 수 있을까.
그 하루는 아무 계획도 없고, 시계조차 보지 않아도
되는 날이었으면 좋겠다.
그저 내 호흡과 내 마음만 따라가며 시간을 흘려보내는그런 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