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모든 것이 그저 흐르도록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져.”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내가 힘들 때 가장 듣기 싫었던 말들이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죽을 것 같이 아프고 힘든데 저런
말은 누군들 못 하겠나. 너무 의미 없는 위로 아닌가.
늘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런 시간이 정말 지나갈 수
있는 건지, 그 시간은 너무 길고 끝이 없었으니까.
시간은 도무지 앞으로 가지 않는 것 같았다.
하루가 일 년처럼 길게 느껴지는 날이 많았다.
십 대에도, 이십 대에도 그리고 삼십 대에도 나에게
인내해야 하는 시간들은 너무 촘촘히 자주 다가왔다.
마치 인생이 날 시험하듯이 난 계속 그것들을 풀어나가야 했다. 하지만 시험은 늘 어려웠다.
“나는 왜 늘 견디는 쪽이지?”
“남들보다 더 오래 참아야, 겨우 똑같은 곳에 도달하게 되는 것 같아.”
해결할 문제 하나 끝나면 또 다른 일이 툭,
겨우 그 일이 해결되면 또 다른 일이 불쑥 나왔다.
그게 반복되니 어느 순간 ‘내 인생이 원래 이렇게
꼬이게 설계된 거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었다.
평온한 가정, 따뜻한 부모 밑에서 세상을 평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 주변에 너무 많았다.
물론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란
말처럼 저마다의 고통은 있었겠지만, 그 고통의
크기는 내 것보다 작아 보였다.
그 고통의 크기를 잴 수 있는 저울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 가장 뜨거워 보였을 뿐이었다. 내 불은 꺼질 줄 모르고 오래 탔다.
내가 바라는 건 큰 게 아니었다. 그냥 평범하게 사는 것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그저 아침에 눈을 뜨는 것이 고통이 아니라 일상의
시작이 되는 것, 숨 쉬는 것만으로도 버겁지 않은 것,
다른 사람처럼 별다른 노력 없이도 주어진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 그런 지극히 당연한 평범함 하나가 왜
나에게는 늘 멀고 아득한 꿈처럼 느껴졌을까.
누가 그냥 위로한다고 풀리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 너는 잘하고 있어’ 같은 말로는 도저히 닿지
못하는 깊이에 있는 무수한 일들.
빨리 헤어 나오려고 할수록 더 힘들어서 힘든 채로
마음을 처박아 두었던 순간들.
그 바닥이 어디일까 그저 바라만 보던 나의 삶.
이제와 돌아보면 어찌 버텼나 싶었던 순간들은
허무하게도 정말 지나가 버렸다.
시간이 해결해 주는 것이 맞았던 걸까.
그때는 발목이 붙잡혀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았는데,
결국 시간은 나를 질질 끌고 앞으로 데려다 놓았다.
억지로라도 끌려간 자리에 결국 내가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아 미쳐버릴 것 같았는데,
지나온 자리에 남은 건 생각보다 얇은 흔적들뿐이었다. 마치 누군가 내 기억의 저장소에서 고통스러운 장면만 골라 지워낸 것처럼, 시간은 그렇게 잔인하면서도
친절하게 모든 것을 씻어내고 있었다.
끝내 포기하지 않고 버틴 내가 있었기에,
시간이 마침내 내 편이 되어준 것일까.
어쩌면 정답은 둘 다일 것이다. 시간이 흘러야만
아물 수 있는 상처가 있고, 동시에 그 길고 끝없는
시간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버텨낸 나의 작은 의지가 있었기에, 마침내 시간이 내 편이 되어준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두렵다. 또다시 무너질지 모르는 미래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삶의 여정이 남아 있단 걸.
하지만 한편으로는 안다.
그 순간 역시 결국은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지금의 내가 그 증거이기 때문이다.
언제든 또다시 흔들릴 수 있지만, 흔들리면서도
일어설 길을 나는 알고 있다.
지금 죽도록 힘들어하는 너에게 이런 글을 남겨본다.
나도 죽고 싶을 때가 있었어.
모든 게 아무 의미 없어 보이고, 아무리 애써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고, 살아남는 게 매 순간 벌처럼 느껴질 때
너무 오래 의젓한 사람 역할을 해와서일 수도 있어.
상처받고도 괜찮은 척, 불안하면서도 이겨내는 척,
두려워도 책임지는 척. 그렇게 애쓴 시간들이,
순조로움 대신 생존을 택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고.
누군가에겐 삶이 줄곧 순조로움이었을 수 있지만,
누군가는 진짜 태어날 때부터, 세상이 주는 미로를
더 복잡한 판으로 받은 사람도 있어.
그건 결코 네가 부족해서가 아니야.
그러니 시간을 믿어보자.
제일 듣기 싫었지만 결국 나를 구원해 준 그 말을,
우리 함께 굳게 붙잡고 의지해보자.
모든 것이 그저 흐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