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기분 나빠도 웃는 건 내가 더 편하려고
감정이 많은 사람은 단단해지는 법보다
조용해지는 법을 먼저 배운다.
피곤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냥, 모른 척하고 웃는 법부터 익히게 된다.
어릴 땐 누가 외모를 평가하거나, 성격을 비하하거나, 기분 나쁜 말을 하면 욱했다.
참지 못하고 화를 내다가 울기도 했다.
속이 울컥 차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말이 쏟아져 나왔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늘 냉랭했다.
감정을 표현하면 더 이상해지는 건 늘 나였다.
그때는 억울한 게 더 컸다.
내가 틀린 것도 아닌데, 내 마음이 다친 건데
왜 내가 참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늘 비슷했다.
“그냥 농담인데 왜 그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
“너, 진짜 예민하다.”
그 말들 앞에서 나는 늘 작아졌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엔 상대에 대한 미움보다
내가 부끄럽고 창피한 마음이 더 컸다.
‘정말 별거 아닌 걸로 내가 너무 오버했나?’
혼자서 자책했다.
그리고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그 사람 얼굴을 보고 지냈다.
마치 내가 정말 쿨한 사람인 것처럼.
물론 사실은 쿨하지도, 괜찮지도 않았다.
억울함보다 관계를 잃는 게 더 두려웠던 거다.
중학교 때였다.
친구가 내 필통을 몰래 뒤져 물건을 숨겼다.
돌려주지도 않고, 자기들끼리 티 나게 킥킥대며 웃었다.
참다못해 “아 빨리 내놔. 짜증 나.”라고 말했는데,
친구는 “야, 장난이잖아” 하며 오히려 버럭 했다.
어떤 애는 “별것도 아닌데 왜 화내냐” 하고 중얼거렸고, 그 말이 내 귀에 또렷하게 꽂혔다.
그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곧바로 분위기가 싸해졌다.
기분 나쁜 건 나였는데, 이상한 애가 된 것도 나였다.
나는 그제야 알았다.
내 마음이 상처받았다고 말하는 순간,
다수가 나를 ‘분위기 깨는 애’로 몰아갈 거라는 걸.
그날,
“화내서 미안해.”
결국 내가 먼저 사과했다.
억울했지만, 그 상황을 더 끌고 가는 게 싫었다.
그런 일은 그때뿐만이 아니었다.
어른이 된 뒤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회사에서 상사가 선 넘는 말이나 행동을 했을 때,
아무도 그것에 대해 문제 삼지 않았다.
나도 불편하다고 말하면 회사 다니기 힘들어질 게
뻔하니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른이 되어도, 예전 중학교 교실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다.
집단의 규칙은 어른이 돼도 달라지지 않는 걸까.
누구든 화를 내거나 짜증내면 분위기가 망가졌고,
분위기를 망가뜨린 사람은 웃고 넘기지 못한
사람에게 몰렸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기분
나쁘다는 말 자체를 안 하게 됐다.
말하는 순간, 관계에서 밀려난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럴수록 나는 웃는 법을 더 빨리 배워야 했다.
그렇게 배우게 된 ‘웃음’은 내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지켜내기 위한 도구에 가까웠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더는 미움받지 않으려고.
결국 나를 지키는 대신, 조금씩 나를 접어두는 쪽을 택했다. 그게 그때의 나에겐,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 같았으니까.
속으로는 상처받으면서도, 아무 일 없는 척.
감정이 많은 내가 또 유난스러워질까 봐.
괜히 또 분위기를 망칠까 봐.
기분 나빠도 웃는 게 내가 더 편할 줄 알았는데,
돌이켜보면 그게 정말 편했던 적은 없었다.
그저 그 순간을 넘기기에 조금 쉬웠을 뿐.
정말 웃고 싶을 땐, 이상하게 웃음이 안 났다.
사람들 앞에선 늘 웃는 내가,
어쩐지 진짜 감정이 필요한 순간엔 어색해졌다.
가짜 웃음을 너무 오래 써서
진짜 웃음이 나올 자리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이제는 진짜 기분 나쁜 말을 들어도 얼굴이 별로
달아오르지 않는다.
울컥하지도 않고, 손이 떨리지도 않는다.
그냥 웃고 넘긴다. 이게 어른이 된 건 줄 알았는데
감정이 너무 오래 갇혀서 이제 반응할 힘도 잃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늘 웃고 있었지만 누구도 내 안에 다가오지
못했다.
결국 감정을 웃음으로 감춘 건 나를 지킨 게 아니라,
나를 더 외롭게 만든 거였다.
남들 앞에서 늘 괜찮은 척을 했지만, 내 안의 벽은
점점 높아져 속을 모르겠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가끔은 나도 미안하다는 말을 듣고 싶다.
그저 장난이었다는 말보다,
그때 그렇게 말해서 미안했다고.
네 마음은 당연했다고.
그 한마디면, 오랫동안 묻어둔 내 마음을 조금은
구할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