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옴똥

by 흰꽃 향기 왕린

연신내 시장 골목은 계절을 가장 먼저 마중 나가는 곳입니다. 칼바람이 여전히 목덜미를 파고드는 음력 정월 하순인데도, 노점 할머니의 때 묻은 무채색 장판 위엔 벌써 노란 봄볕이 쏟아져 나와 있었습니다. 봄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 땅바닥에 바짝 귀를 대고 있었을 녀석들. 찬 이슬과 맵찬 된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느라 잎사귀 끝은 거칠게 그을렸지만, 속살만큼은 옹골찬 ‘보옴똥’입니다.


홀린 듯 녀석들 앞에 무릎을 접고 앉아 얼굴을 뜯어봅니다. 제 흥에 겨워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웃자란 이파리들을 서로의 발가락 사이에 끼워 넣고 간질이며 웃고 있는 것만 같습니다. 납작한 배추가 대견해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을 흘리는데, 그새 흙손이 되어 파뿌리를 다듬던 할머니가 내 마음의 빗장을 툭 지르십니다.


“어따, 서울내기 같은디, 진도 봄똥 맛을 지대로 낼랑가 몰라. 걱정 마러, 발구락으로 무쳐놔도 맛 나는 게 바로 이놈이여!


할머니의 질퍽한 사투리에 지나가던 사람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섭니다.


발가락으로 무쳐도 맛있다니요. 그 능청스러운 말 한마디에 내 마음속 주방에서 벌써 도마질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연두색 잎은 큼직하게 뜯어 구수한 강된장에 쌈 싸 먹어야지. 아작, 하고 앞니를 타고 정수리까지 울리는 경쾌한 파열음에 겨우내 잠들어 있던 미각이 번쩍 눈을 뜰 겁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코끝을 알싸하게 건드리는 멸치액젓에 새큼달큼한 매실청 한 바퀴 쓱 돌리고, 말린 고추 빻아 만든 양념장으로 버무려낼 겉절이는 또 어떻고요. 갓 지은 밥 한술 푹 뜨고 막 무친 뻘건 잎 척 걸쳐 먹으면, 열 반찬인들 부럽겠습니까.


문득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만난 겨울 배추가 떠오릅니다. 눈 속에서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기어이 단맛을 응축해 내던 혜원의 배추처럼, 납작 엎드려 고추바람을 견딘 봄동의 처지도 그와 다르지 않을 터. 나도 남은 잎사귀들은 기름 넉넉히 두른 팬에 지져낼 참입니다. 달큼한 배추 향이 기름 냄새와 섞여 온 집 안에 ‘치이익’ 소리를 내며 퍼지겠지요. 노릇하게 구워진 전을 손으로 쭉쭉 찢어낼 때, 그 사이로 배어 나오는 뜨거운 단맛이라니. 그런 봄동 전 한 접시 들고 4호, 5호 문을 두드리며, 첫 봄을 배달하는 속달 집배원이 되어보는 상상. 그 정겨운 풍경을 마음으로 먼저 한 입 베어 물고 나니, 먹지 않아도 이미 배가 부른 듯합니다.


허기진 상상만으로 봄동 요리 몇 가지를 머릿속 가득 차려내고 나니, 내 입안에는 달싸하고 풋풋한 봄물의 향기가 쌉싸름하게 감돕니다. 돈 몇천 원에 봄을 통째로 산 것 같은 사치스러운 기분. 상큼하고 아삭한 잎사귀를 볼이 미어지게 씹고 나면, 텁텁했던 일상의 무거움도 씻겨 내려갈까요.


보옴똥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고 어영차 일어섭니다. 등 뒤로 할머니의 웃음 섞인 배웅이 또 한 번 따라붙습니다.


“꼭 발구락으로 무쳐 먹어봐야 혀!”


익살스러운 비법 한 줄을 무슨 든든한 밑천이라도 얻은 양 가슴팍에 품고 걸어가는 길, 봄이 벌써 검은 봉지 속에서 야옹야옹 부스럭거리며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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