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시간의 산행, 그리고 가슴에 남은 백두산
최근 다녀온 전시회에서 한지에 담긴 수묵담채화 백두산을 보았다.
“아! 백두산”이라는 제목처럼 하늘빛을 머금은 천지와 봉우리, 구름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순간, 10여 년 전 백두산에 올랐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황당한 경험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다시는 겪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었다.
당시 우리 일행 10명은 국내 산행 경험을 바탕으로 백두산 트레킹에 나섰다.
첫째 날, 북파 코스의 설렘
첫날은 북파(北坡) 코스를 택했다. 관광버스를 타고 이동한 뒤, 40여 분 급경사 길을 걸어 정상에 올랐다. 길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렸고, 긴 막대기 두 개로 사람을 메고 오르내리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정상에 오르니 날씨가 맑아 푸른 천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치 하늘이 천지에 내려온 듯, 깊고 푸른 물빛이 흰 구름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졌다. 그 순간의 벅참과 경이로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오래 기다렸지만, 그 기다림조차 설레는 시간이었다. 이번 전시회에서 본 작품은 바로 그때의 천지를 떠올리게 했다.
{산행 때 일행이 담은 백두산 전경} {"아! 백두산" 수묵담채화, 목우당 김봉빈}
둘째 날, 서파 코스의 모험
하루를 쉰 후, 우리는 서파(西坡) 트레킹에 나섰다. 북파와는 전혀 다른 여정이 시작되었다. 자칭 심마니라던 가이드가 우리를 안내했는데, 등산로는 한산했고, 풍광은 빼어났다. 가이드는 산속에 숨겨둔 도구들을 보여 주기도 했고, 길가에는 커다란 곰 사체가 그대로 있었다.
다른 등산객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우리 일행만이 그 길을 올랐다. 무거운 수동 카메라를 번갈아 메고 오르다 떨어뜨리기도 했지만, 다행히 작동에는 지장이 없어 중턱의 얼음 앞에서 인증 사진을 남길 수 있었다.
정상부에 이르자 나무들은 키가 작아지고, 발밑은 스펀지를 밟는 듯 푹 빠지는 풀밭이었다. 힘겨운 걸음 속에 온몸은 땀에 젖고 다리는 천근만근이 되었지만, 정상이 조금씩 가까워오는 설렘이 우리를 이끌고 있었다.
해가 질 무렵, 드디어 천지에 도착했다. 붉은 석양에 물든 천지는 첫날과는 또 다른 장엄함을 보여 주었다. 고된 산행 끝에 마주한 그 풍경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이었다.
예상치 못한 시련
곧 어둠이 밀려왔고, 우리는 서둘러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하산을 시작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참을 걸어 내려오는데, 멀리서 군인들로 여겨지는 목소리가 들려와 가슴이 철렁했다.
그렇게 14시간이 넘는 산행 끝에 밤 9시 무렵 겨우 출구에 도착했다. 하지만 게이트는 굳게 닫혀 있었다. 그제야 가이드가 입장료를 내지 않고 우리를 비공식 루트로 안내했음을 알게 되었다.
여행사에 연락해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가이드가 입장료를 납부하고, 우리는 문이 열리며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온몸에 피로가 몰려왔지만, 황당함과 함께 무사히 산을 내려왔다는 안도감이 뒤섞인 순간이었다.
남은 것들
그 사건 때문에 나머지 여행 일정을 취소하고 곧장 귀국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날의 백두산을 이야기한다. 국내 산행에서도 그때의 추억을 나누곤 했다. 히말라야 등반을 꿈꾸며 준비했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다.
전시회에서 본 “아! 백두산”은 그날 백두산의 감격을 다시 소환하고 있었다.
그날의 아름다운 천지와 길고 힘들었던 산행, 그리고 함께 했던 소중한 동지들이 그리운 밤이다. 어떤 그림으로도 담아낼 수 없는 그날의 감동이, 여전히 내 가슴속에 살아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