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의 독서의 여정, 느린 사유의 기록
2025년 8월 22일쯤이었을 것이다.
AI 관련 책 몇 권과 함께 묵직한 한 권의 책을 샀다.
『쓰는 인간』(The Notebook: A History of Thinking on Paper).
그때는 몰랐다.
이 책을 다 읽는 데 반년이 걸릴 줄은.
장로 고시가 있었고,
선물 받은 책이 있었고,
반납 기한이 정해진 도서관 책들이 있었다.
읽다가 덮고, 덮었다가 다시 펼치고,
그러다 또 밀렸다.
2026년 2월 18일,
해가 바뀐 뒤에야 마지막 장을 덮었다.
노트가 세상을 바꾸기 전
책은 기원전 1000년에서 시작한다.
종이가 없던 시대, 사람들은 돌에, 양피지에, 밀랍판에 기록했다.
지웠다가 다시 썼고, 덧붙였고, 고쳐 썼다.
기록의 형식은 달라도
‘남기고 싶어 하는 마음’은 같았다.
놀랍다.
노트가 없던 시대에도 사람들은 기록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기록이 지금까지 남아 우리가 읽고 있다는 사실에.
1404년 1월 1일이라고 적힌 장부가
지금도 피렌체 기록보관소에 남아 있다니.
피렌체의 상인 그레고리오 다티는
자신의 거래 내역과 함께
자신의 신앙과 다짐,
죄와 후회까지 적어두었다.
“이 내용을 글로 적어 놓았으니 아마 나의 약속을 지킬 것이고,
약속을 깨는 일이 생기면 부끄러워할 것이다.”
621년 전의 한 인간이
자신을 붙들기 위해 기록한 문장이
지금 나를 붙든다.
작은 책자에 가벼운 필치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말했다.
“항상 지참해야 하는 작은 책자에 가벼운 필치로 메모하라.”
기억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다윈’도 말했다.
피렌체 상인들의 리코르단체,
치발도네라 불린 개인 전집,
항해자의 노트,
작가들의 초고 노트.
그들은 기록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었다.
노트는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구현하는 도구였다.
스마트폰과 종이 사이에서
요즘 나는 스마트폰에 생각을 적는다.
노트북에 메모를 남긴다.
편리하다.
빠르다.
하지만 다시 꺼내 읽지 않는다.
몇 년 전부터
중요한 문장, 떠오른 생각, 독서 기록을
메모장에 적어 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파일 속에 잠들어 있다.
얼마 전 몇 권의 노트를 샀다.
한동안은 그 종이의 질감을 즐기며 손으로 기록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편리함에 취해
다시 노트북과 휴대폰이 더 가까워졌다.
종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시대에
나는 종이를 충분히 사용하고 있는가.
손자가 책을 안고 간 날
작년 10월의 어느 날,
손자가 이 무거운 책을 가슴에 안고 차에서 내렸다.
“할아버지 책이야.”
책을 달라는 말에 책장에 뽀뽀를 하며 달아난 아이.
아이는 책을 원한 것이 아니라
그 책을 볼모로 할아버지를 곁에 두고 싶어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인류가 기록을 남겨온 이유도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와 이어지고 싶어서가 아닐까.
600년 전 다티의 장부가 남아 있듯,
이 아이도 언젠가
내가 남긴 노트를 보게 될까.
노트는 단지 기록이 아니라
세대를 건너가는 물성이다.
아픔을 글로 옮긴다는 것
지난 몇 년,
아픈 시간을 지났다.
시와 산문으로 기록했다.
다시 읽으니 아직도 아픈 글이었다.
그러면서도 이 책은 말한다.
속상한 경험에 대해 글을 쓰면
정서적인 것이 인지적인 것으로 바뀐다고.
트라우마를 표면으로 끌어올려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고.
글쓰기는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를 잠식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긋는 일인지도 모른다.
행간을 읽는 사람
요즘 나는 말을 조심한다.
그래서 마음속에 담아두거나
노트에 적는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
관계는 겉돌고
마음은 닫힌다.
한 사람을 이해하려면
행간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타인의 행간을 읽고 있는가.
그리고 내 행간은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있는가.
노트는
말하지 못한 문장들의 쉼터가 된다.
다시 노트를 들다
Roland Allen은 말한다.
충분히 사용하라.
그러면 노트가 뇌를 바꿀 것이라고.
종이는 값싼 대체물이 아니라
사유를 확장하는 도구였다.
작은 문장이라도 좋다.
짧은 생각이라도 괜찮다.
다만, 사유하며 쓰고 싶다.
스마트폰이 아니라
백지 위에.
쓰는 동안
생각은 더디게 흐르고
더디게 정리된다.
그 느림이
나를 지켜줄 것 같다.
“일기를 써라. 그러면 언젠가는 그것이 당신을 지켜줄 것이다.”
나는 다시 노트를 들었다.
그리고 안다.
나는 이미
쓰는 인간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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