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피어난 꽃

시의 언어로 되살아난 나의 기억

by 마음의여백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어느 날, 나는 낡은 시집 한 권을 펼쳤다.

함민복 시인의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1996년에 출간된 이 오래된 시집 속 73편의 시를 한 편씩 정성껏 읽어 내려가며,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그 의미를 소화하기 시작했다. 시를 이토록 깊이 읽어본 기억이 언제였던가 싶을 만큼, 시인의 정제된 시어는 내 안에 잠자던 기억과 감각들을 깨워냈다.


짠 눈물로 닦아낸 어머니와 아버지의 기억


시인은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시 곳곳에 심어두었다. 가세가 기울어 어머니를 이모님 댁으로 모셔야 했던 날, 함께 고깃국을 먹으며 눈물을 숨기던 시인의 '짠 눈물'은 그 슬픔이 고스란히 가슴으로 밀려왔다. 나 또한 시인과 비슷한 시대를 살아왔기에 그 아픔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가끔 고향에 내려가 외식을 해도 입맛이 없다며 식사를 조금밖에 못 하시는 나의 어머니를 뵐 때면 마음이 아려온다. 시인은 바다에 몸을 푼 어머니의 눈물을 '미역'으로, 흔들리는 삶을 '통통배' 소리로 그려내며 사랑이 곧 '우주의 헌법'이라 노래한다. 그 시를 읽으며 나는 달이 늘 가슴에 어미 피를 순환시켜 주었다는 대목에 오래 머물렀다. 시인에게도, 나에게도 부모님은 여전히 우리를 붙들고 있는 존재임을 느꼈다.


형을 떠나보낸 자리에 핀 '봄의 소식'


시집을 읽는 도중, 나는 지지난해 차가운 겨울에 떠난 형을 보기 위해 묘원을 찾았다. 묘역을 맴돌며 울던 까마귀 떼는 시 속의 '공터'나 '묘지'를 연상시켰다. 형의 비명(碑銘) 앞에서 나는 '봄이 오는데'라는 마음의 시를 썼다.


계곡의 얼음이 풀리고 매화가 소식을 전해오는데,

카메라를 메고 봄을 담자던 형은 먼 산만 바라보고

불러도 불러도 대답이 없네


봄은 오고 있었지만, 형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형이 떠난 자리를 채울 수는 없지만, 남은 이들의 곁에 더 가까이 있겠노라 다짐하며 눈물을 닦았다.



경계, 그곳은 삶과 죽음이 맞닿은 자리


시집의 마지막 시 「꽃」에 이르러서야 나는 제목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겼다. 시인은 달빛과 그림자, 집 안과 밖, 전생과 내생, 그리고 '내 것'과 '내 것 아님'의 경계를 이야기한다.


내가 생각하는 경계는 삶과 죽음이 맞닿은 자리, 과거와 현재가 스쳐 지나가는 자리다. 화려함의 반대편에서 바람만 드나드는 공터, 무덤가의 고요, 그 삭막해 보이는 경계 위에도 꽃은 피어난다. 발문에서 말하듯 '살아짐'과 '사라짐'의 경계가 바로 삶이라면, 우리가 흘리는 눈물은 아직 사라질 때가 아니라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예전의 나는 시인의 뜻을 정확히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안다. 시는 정답이 아니라 울림이라는 것을. 그 울림 위에 나의 기억을 얹는 일,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시인이 남긴 마음의 발자국들을 가슴에 고이 담으며, 나는 오늘도 마음의 공터를 헐지 않고 그 여백에 피어난 그리움을 응시한다.

참으로 귀한 시들을 만난, 맑고 서러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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