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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영철 Nov 17. 2024

왜 그렇게 그렸니? 서양미술사

6-2. 오직 신과 함께, 중세 미술(9~11세기초)

중세 시대, 미술가보다는 장인




앞서 언급한 '카롤링거 르네상스'는 카롤루스 대제 사후 9세기까지 이어진다. 카롤루스 대제는 기독교에 기반한 하나의 통일화된 문명을 건설하길 원하여 궁정 학교를 세웠고 유럽 전역에서 학자들을 모았으며, 교회와 수도원 그리고, 도서관을 세워 중세 교육을 발전시켰고 예술을 후원했다. 특히, 자신의 궁전이 있는 아헨을 과거 로마와 필적한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기를 원했다.


당시 기독교에 기초한 문예 부흥 운동의 주요 활동 중의 하나가 성경의 필사와 보존이었다. 주로 라틴어 성경을 수집하여 이를 필사한 여러 복사본들을 만든 후 수도원과 도서관 등에 보관하도록 했는데, 신자들 대부분이 라틴어를 모르기 때문에 신/구약성경의 사건과 이야기를 그림으로 표현한 일러스트(삽화)를 삽입하여 성경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 또한 필사의 중요한 역할이었다.


참고로 모든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종교개혁 후 1522년 마틴 루터의 독일어 번역 성경과 1526년 윌리암 틴테일의 영어성경 번역본이 나온 이후로 당시로부터 약 700년 뒤의 일이다.


아무튼, '카롤링거 르네상스'미술의 대표 걸작 중 하나가 성경 필사본에 있었으니 <위트레흐트 시집>이다. 108장의 송아지 피지가 사용된 이 시편집은 생동감 넘치는 '펜'으로 그려진 166개의 일러스트가 각 시편들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한때 6세기 작품으로 여겨지기도 했는데 4~5세기 후기 로마 시대에 제작된 필사본과 시각적으로 거의 흡사했기 때문으로 글씨체와 건물, 풍경, 동물, 복식 등이 후기 로마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편집은 카롤링거 왕조의 사고방식을 엿볼 수 있는데 당대의 선과 악의 언저리에서 찾을 수 있는 테마, 폭력과 전쟁, 왕권의 행사, 신의 보호라는 중세적 세계관으로, 폭력은 도덕적·신학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하며, 단순히 비극적 사건이 아니라 신의 계획의 일부로 묘사함으로써 왕의 정당성과 신성성을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위트레흐트 시집>은 이후 앵글로섹슨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주어 '위트레흐트 양식'을 탄생시키는 등 기독교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필사본의 대표 걸작이라 평가받고 있다.



위트레흐트 시편집 / 830년 경
시편 82편과 삽화(좌)와 예배와 찬양, 경배의 내용을 표현한 삽화(우)



카롤루스 대제 사후 분열된 3개의 왕국 중 가장 강력한 정치세력을 건설한 이는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로, 962년 신성로마제국을 수립하고 서유럽 기독교 세계의 새로운 구원자로 황제(Kaiser)에 즉위하였다. 오늘날의 독일과 이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라인강 동쪽에 세워진 이 신성로마제국과 달리 라인강 서쪽 지역에서는 위그 카페(Hugues Capet, 940-996)가 서프랑크 왕국을 계승해 987년 프랑스의 전신인 카페왕조를 열게 된다.


동프랑크 오토 왕조의 최대의 과제는 9세기 카롤링거 르네상스에 버금가는 국력의 회복과 문예의 진흥, 기독교의 보급이었다. 특히, 세 살의 나이에 재위에 오른 오토 3세의 스승이자 재상으로서 성직자 관료국가인 오토 왕조의 핵심 권력자인 '베른바르트 주교'는 신성로마제국의 이상과 통치이념을 건축과 조각, 청동 주물 작품으로 표현하고자 하였으니 힐데스하임 대성당을 위해 제작된 청동문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왼쪽 문에는 창세기, 그 반대쪽에는 예수의 생애가 청동 주물로 표현된 <베른바르트 청동문>은 문짝 하나가 하나의 청동판으로 제작되었고 높이가 약 5m, 무게가 2 ton에 이르러 당시 기술을 고려할 때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으며, 독일에서 금속으로 제작된 이미지 연작 작품 중 가장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베른바르트 청동문과 청동 부조 / 1015년 경
베른바르트 청동문의 '타락한 아담과 이브'(좌)와 '아담' 확대(우)



위 부조는 하나님이 타락한 아담과 이브에게 다가가 꾸짖는 장면으로 그리스 시대의 조각과 비교하면 조악해 보일지 모른다. 인물들의 비례가 지켜지지 않았고 아담과 이브의 육체가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단순한 배경 속에 의미를 갖는 주인공들만 명확하게 표현되어 우리는 그들의 제스처가 의미하는 바를 금방 읽어 낼 수 있다고 곰브리치는 애써 그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하나님은 아담을 가리키고 아담은 이브를, 이브는 땅 위의 뱀을 가리키고 있다. 죄의 전기와 악의 근원이 너무나도 힘차고 명확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인물들의 비례가 엄격하게 지켜지지 않았고 그들의 육체가 우리의 기준으로 보아서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것도 간과하게 된다."_P167/Story of Art


중세의 미술가는 권력자의 의뢰에 따라 물건을 만들어 주는 숙련된 장인으로서 기능적 역할을 수행했던 사람들이라 정의할 수 있다. 특히, 수공업 길드(guild)의 일원으로 공공 목적의 작업을 공동 작업으로 진행하여 작품에 개인적 서명을 남기는 관습도 없었고 의뢰인의 지위에 따라 작업의 가치도 평가되어져 익명성이 강조되었고 또한 일반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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