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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그렸니? 서양미술사

6-3. 오직 신과 함께. 중세미술(11~12세기)

by 최영철

미술, 성경을 위한 그림책



1066년 12월 25일,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공작이 영국의 왕이 되었다. 9세기 경, 유럽의 약탈자였던 바이킹족이 프랑스의 노르망디 점령 후 약 2세기 만에 영국 전역의 공식적인 통치자가 된 것이다. 바이킹족의 후예인 이 노르망디 출신의 월리엄 공작과 노르만 귀족들은 영국의 주요 영지를 장악하였고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바이킹 문화 즉, 노르만 문화를 영국에 이식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건축 양식인 '로마네스크 양식'은 영국 지형과 노르만 문화가 섞이고 변형되어 영국식 로마네스크 양식인 '노르만 양식'을 탄생시켰다.


*로마네스크 양식

이름 자체가 '로마풍'이라는 뜻을 담고 있으며, 고대 로마의 건축 기법을 기반으로 한다. 로마네스크 건축에서 볼 수 있는 두꺼운 석조 벽과 둥근 아치, 둥근 천장(배럴 볼트)은 모두 고대 로마의 아치형 구조에서 비롯되었다.


로마네스크와 노르만 양식은 기본적으로 같은 양식이다. 그러나, 당시 영국 내의 잦은 분쟁으로 외부 침입에 대비한 요새화 구조(높은 탑, 좁은 창문 등)로 방어 기능을 강화한 것이 '노르만 양식'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표 건축물, 이탈리아의 피사 대성당/1063
노르만 양식의 대표 건축물, 영국의 더럼 대성당/11세기 경



중세는 흔히 신의 시대로 불리며 기독교적 세계관이 사회 전반을 지배했다. 따라서, 교회의 권위가 강화되고 신학적 논쟁이 심화될수록 교리적 문제와 성경 해석의 명확한 해답이 요구되었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기독교 교리에 기반한 논리적 체계를 갖춘 스콜라 철학이 탄생하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와 기독교 신학을 결합하여 신앙의 신비를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목표한 스콜라 철학은 중세 대학의 학문적 활동과 교회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어 발전하게 되었으며, 당시 교회 미술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인 작품이 프랑스의 샤르트르 대성당의 정문에 새겨진 <왕의 포탈>과 '스테인드글라스'이다. *포탈=현관문


샤르트르 대성당 서쪽 파사드(좌)와 전경(우)/12세기 재건



철학이라는 논리적 사상이 신비로운 종교의 영역을 시각적 표현의 결과인 미술에 어떻게 반영이 되었고, 중세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표현했는지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샤르트르 대성당 서쪽 파사드의 <왕의 포탈>/12세기
<왕의 포탈>, 3개의 문 중 중앙 문 상단(팀파눔)의 조각 세부



위의 <왕의 포탈>에 새겨진 조각들을 보면 성경의 인물들과 교회의 교리를 생동감 있게 보여주는데, 인간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탄생과 부활, 승천, 재림, 심판인 기독교의 역사적 서사를 3개의 현관문 상단과 기둥에 논리적으로 배치하여 인간이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 최후의 심판과 구원의 교리를 시각화하였다. 예를 들어, 위의 중앙문 상단의 조각에 대해 미술사가들은 그리스도가 정면에 배치되어 있고 그 주위에 4명의 복음사가를 상징하는 동물들과 24명의 장로들, 그리고, 12명의 제자가 하단에 묘사되어 있어, 신도들은 위의 예수의 모습에서 정의와 자비의 모습을 불 수 있으며, 이는 신의 심판이 단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개념임을 깨닫게 된다고 말한다. 물론, 성경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긴 하다.


그리고, 중세 하면 떠오르는 것이 다채로운 색상이 인상적인 '스테인드글라스'이다. 이 '스테인드글라스'는 12세기 고딕 양식의 성행과 함께 전성기를 맞이하는데, 그 이유는 건축 기술과 관련이 깊다. 이전의 로마네스크 양식은 아치의 하중을 버티기 위해 벽이 크고 두꺼워야 해서 창문이 작아질 수밖에 없었으나 건축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벽은 얇아지거나 없어지고 창문이 커지게 되어 기존에 벽에 그렸던 벽화들이 창문을 활용해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환경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고딕양식의 가장 큰 특징이 뾰족한 첨탑과 큰 창문에 따른 '스테인드글라스'인 것이다.


특히, 이성과 신앙의 조화를 강조한 스콜라 철학은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신성한 진리를 상징하고 인간의 이성으로 그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상징적 도구로 해석하여 그 사용을 더욱 촉진시켰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실내 전경(좌), 고딕 양식의 시초로 알려진 생드니 대성당 실내 전경(중앙, 우)/12세기



이렇듯 중세의 미술에게는 더 이상 자연의 모방이 아닌 주제의 한정 즉, 성경과 이를 전달하기 위한 단순화된 표현 방식으로 인해 '상징성'의 강화와 그것을 어떻게 '구성'하느냐를 실험하는 새로운 자유가 주어졌다. 물론, 대다수 신자들이 문맹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이 시기의 회화는 사실 그림을 통해 글을 쓰는 형식으로 되어가고 있었다. 색채 또한 형태와 마찬가지 방향으로 나아갔다. 미술가들은 자연 속에 나타나는 음영의 농담을 연구하고 모방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림에 자기가 좋아하는 색채를 자유롭게 선택했다. 자연계를 모방할 필요에서 벗어남으로써 얻은 이 자유는 그들로 하여금 초자연적인 세계의 관념을 전달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_P183 / Story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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