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절정의 르네상스, 16세기 초 피렌체
16세기 이탈리아 미술을 빛낸 두 번째 피렌체 미술가는 '미켈란젤로'이다. 그는 '레오나르도'와 같이 해부학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였으나 해부학을 인간에 대한 수많은 수수께끼 중 하나로 본 '레오나르도'와는 달리 이 하나의 문제만을 완전하게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그를 모든 각도에서 인체의 표현이 가능하고 고대의 거장들을 능가하며, 당시 23살 연상인 '레오나르도'와 필적한다는 평가를 받게 하였다.
우리는 '미켈란젤로'를 <피에타>, <다비드> 등을 만든 조각의 거장으로만 알고 있으나 시스티나 성당의 <아담의 창조>, <최후의 심판> 등의 회화와 세계 최대 성당인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을 직접 설계한 것은 비교적 덜 알려졌다.
1511년 로마,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요청으로 로마의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를 그리고 있었다. 천정화는 천지창조, 아담과 이브의 창조/타락/추방, 노아 이야기 등 구약성서의 주요 내용을 3묶음 9장면으로 구성하였다. 이 작업은 약 30m 높이를 올라가 *비계에 드러눕듯 몸을 짓이겨야 했고 회반죽을 펴 발라 물기가 마르기 전에 빨리 색을 칠해야 하는 중노동으로, 신경통과 관절염을 한 동안 몸에 달고 살아야 했으며, 조각가에게 프레스코화를 요청한 교황과 크고 작은 갈등을 겪기도 한 그에게는 다사다난한 작업이었다.
*비계:높은 곳에서 공사를 할 수 있도록 임시로 설치한 가설물
특히, 천정화 중 가장 유명한 그림은 4번째에 위치한 <아담의 창조>로, 천정화 작업 막바지에 그려졌다. 하나님이 지천사(智天使)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알몸의 아담이 이를 아련하게 보며, 그의 왼팔을 뻗어 생명의 기운을 하나님으로부터 건네받으려는 장면이다. 그러나, 둘의 손가락은 아직 닿지 않아 아슬하기에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는데, 이는 인간의 창조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암시하며 인간 존재의 본질적 불완전성을 상징한다.
후대 사람들은 '미켈란젤로'의 3대 조각 작품으로 <피에타>, <다비드>, <모세>를 꼽는다. 특히, 프랑스 추기경의 의뢰로 제작된 <피에타>는 이 3대 작품 중 최고의 걸작으로 당시 그의 나이 24세에 자신의 기술과 예술적 야망을 드러내기 위한 작품이기도 했다.
피에타(Pieta)는 '자비를 베프 소서'라는 뜻으로 자식의 죽음으로 슬프지만 이 또한 하느님의 뜻임을 알고 순종했던 마리아의 경건한 믿음을 일깨워 준다. 당시 마리아의 얼굴을 젊은 여자로 표현하여 비난을 받기도 하였는데 '미켈란젤로'는 영원한 마리아이기에 얼굴 역시 처음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말해 논란을 종식시켰다고 한다. 조형적으로 보면, 마리아는 왼쪽으로 살짝 기울어져 있어 무게 중심이 오른쪽인 예수와 균형을 맞추고 있으며, 마리아의 오른 다리를 약간 높게 함으로써 예수의 몸도 위에서 아래로 자연스럽게 흐르게 하여 그의 축 쳐진 팔의 느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또한, 마리아의 크기를 실제보다 크게 하고 치맛자락을 섬세하고 풍성하게 조각하여 예수의 몸을 자연스럽게 감싸고 있어 전체적으로 조화로운 균형감을 보여 준다.
특히, 예수의 얼굴은 아래에서 보았을 때 고되고 힘든 표정처럼 보이지만 위에서 보았을 때는 평화롭게 잠든 것처럼 보여 마술 같은 그의 표현력이 놀라울 따름이다.
"미켈란젤로는 처음부터 그가 작업을 하고 있는 대리석 속에 인물들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조각가로서 그가 해야 할 일은 단지 그들을 덮고 있는 돌을 제거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조각상들의 윤곽 속에는 본래의 대리석 덩어리의 단순한 형태가 반영되어 있어서 그 인물상에 제아무리 많은 동작이 포함되어 있다 하더라도 명료한 전체적인 통일성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_P 312 / Story of Art
'미켈란젤로'는 단순히 고전을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비드>의 당당함, <모세>의 힘찬 표정과 자세 등 독창적인 조형 언어를 창조하였고 때로는 감정과 역동성을 강조하기 위해 신체 비례를 왜곡하여 극도로 이상화된 조형미를 추구하며 '후기 르네상스 매너리즘'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는 '르네상스는 이런 것이야'라고 정의하는 동시에 그 한계를 극복한 '르네상스적 인간의 전형'으로 평가받으며 예술적 영감과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1504년,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가 피렌체에서 서로 경쟁하고 있을 때 한 젊은 화가가 우르비노라는 작은 도시에서 피렌체로 왔다. '라파엘로 산치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