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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그렸니? 서양미술사

10-1. 식상한 르네상스는 가라, 바로~크 시대. 17세기 전반기

by 최영철

빛과 어둠속의 리얼한 현실, 카라바조




르네상스를 뒤이은 양식을 보통 바로크(Baroque)라고 부른다. 16세기 보석과 진주 무역의 중심지였던 포르투갈의 보석상들이 기형적이고 못생긴 진주의 상품 등급을 'barroco'라고 불렀고, 이 말이 유럽으로 퍼지면서 유래가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예술 양식 이름들은 이렇듯 처음에는 그 양식을 낮추어 보거나 비웃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었다.


'고딕'이라는 말도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미술 비평가들이 야만적 양식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한 것으로, 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약탈했던 고트족이 이 양식을 이탈리아에 퍼뜨려 비롯된 것이다. '매너리즘'이라는 말 또한 17세기 비평가들이 16세기말의 미술가들을 비난하기 위한 것으로, 형식만 따르는 가식과 천박한 모방이라는 의미였다. '바로크'라는 말 역시 조롱의 의미로, 17세기 예술을 보며 못생긴 진주처럼 너무 과장되고 기괴하다는 뜻으로 사용된 단어였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이성적이고 완벽한 비율만이 옳다고 믿었던 사람들에게는 이 고전 양식을 자유롭게 바꾸거나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타락한 취향'으로 보였던 것이다. 과연 '타락한 취향'으로 보이는지 본격적으로 들여다보자.


'바로크'는 17세기 유럽에서 발전한 예술 양식으로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미술과는 기본적으로 대조적 특성을 가진다. 르네상스가 피렌체, 베네치아 등의 경제적 부를 기반으로 꽃을 피웠다면, '바로크'는 종교 개혁 이래로 전쟁 등 유럽의 혼란 속에서 발전했다.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신교에 대한 가톨릭의 '반종교 개혁의 도구'로, 프랑스에서는 '절대 왕정의 강화'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흔히들 '바로크'의 시작을 알린 대표적인 미술가로 '카라바조'를 지목한다. 앞서 언급한 바 가톨릭의 반종교 개혁에 따라 신자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믿음을 다시 불러일으키기 위한 새로운 스타일의 성화가 필요했고, 마침 '카라바조'의 직관적이고 극적인 회화 스타일은 딱 안성맞춤이었다. 르네상스 후기의 이상화된 아름다움이나 균형에서 벗어나, 강렬한 명암 대비와 감정 이입이 용이한 현실적인 인물 표현은 그를 '바로크'의 선구자로 낙점하였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비견될 정도로 서양미술사에 큰 획을 그은 천재 미술가로, 현재는 이탈리아 리라화 10만원권에 얼굴이 실릴 정도로 추앙받는 국민화가다. 그러나, 석공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생애는 반전의 연속이었다. 밀라노에서 그림을 배운 후 로마로 건너가 <성 마태의 소명>, <성 마태의 순교>의 작품으로 명성을 얻으면서 성공 가도를 달렸으나, 거친 성격과 기이한 행동으로 7번의 투옥과 전과 14범이 말해 주듯이 그는 불우한 인생을 살았으며, 한 남성을 살해한 후에는 탈옥자, 도망자로 나폴리, 몰타, 시칠리아 등을 전전하다 38세로 비극적인 삶을 마쳤다.


그를 이탈리아의 스타 작가로 만들어준 <성 마태의 소명>은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에서 성 마태오의 생애를 기리는 대형 연작 의뢰 중 한 작품이다. 당시 성화를 그릴 때는 천사, 성인 등을 이상화해서 그리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카라바조'는 성경 속 이야기를 현실 속의 거칠고 평범한 사람들로 있는 그대로 묘사하였다.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좌), 성 마태오 연작 by 카라바조 / 1599년




이 작품은 예수가 세금징수원(세리)인 마태오를 보고 '나를 따라라'라며 그를 제자로 삼았다는 마태오 복음의 일화를 그린 것으로, 그의 핵심 컨셉이라 할 수 있는 빛과 어둠의 극적인 대비를 잘 보여 준다. 예수의 머리 위로 지나가는 사선의 빛은 창문을 지나 마태오와 동료들의 얼굴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데, 이 빛은 예수의 소명이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운명임을 상징한다.


특히, 성경의 이야기를 이상화시키거나 베드로가 살았던 그 옛날의 모습이 아닌 17세기 당시 현실 속 사건처럼 풀어내어, 지금의 우리도 언제든 예수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줌으로써 충격과 감동을 배가 시킨다.


성 마태오의 소명 by 카라바조 / 1600년 경




'카라바조'의 열렬한 후원자였던 '유스티니아니'라는 로마 귀족의 의뢰로 그려진 <의심하는 토마>는 세 사도들이 예수를 보고 있고 이 중 한 사도가 손가락으로 예수의 옆구리 상처를 찔러보는 장면을 보여준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에게는 이 상황이 대단히 불경스럽고 파격적으로 보일 것이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사도들은 아름답게 주름이 잡힌 옷을 걸친 위엄 있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있었지만, 이 작품에서는 온갖 풍상을 겪은 얼굴과 깊은 이마의 주름이 보통 노동자들의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또한, 부활한 예수를 의심하는 성 토마(도마)의 꼴사나운 동작은 마치 우리 역시 눈앞에 기적이 펼쳐져도 선뜻 믿지 못하고 망설일 수 있음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_요한복음 20장 20절


의심하는 토마 by 카라바조 / 1602년 경



곰브리치는 '카라바조'를 '가톨릭 교회권의 유럽'편에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위대한 예술가였던 그는 그 전의 조토*와 뒤러*처럼,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마치 그의 이웃집에서 일어난 듯이 그 자신의 눈앞에 그려보고 싶어 했다. 그가 명암을 다루는 방법도 등장인물들을 보다 진실되고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해서다. 그의 빛은 인체를 우아하고 부드럽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깊은 어둠과의 대조를 생겨나게 하는 눈부시도록 번쩍이는 거센 빛이다. 그러나, 그 빛은 이 이상한 장면 전체를 조금도 타협하지 않고 정직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다. 이것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시에는 거의 없었으나 후대의 화가들에게는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_P 393 / Story of Art


예민하고 괴팍했던 그의 성격은 불우한 성장 배경과 세상과의 끝없는 충돌 속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러한 삶과 내면은 '키라바조'만의 예술로 고스란히 투사되었다. 전통적인 경건함보다는 인간적인 고통과 고뇌를 적나라하게 묘사하였고, 성경 속의 인물을 술집의 여인이나 노숙자 등으로 표현한 극적인 리얼리즘은 루벤스, 벨라스케즈, 렘브란트 등 동시대 거장들에게도 강한 자극과 영향을 주게 된다.


*조토-13세기말의 화가로 중세시대에 사실주의적 표현으로 르네상스의 문을 연 선구자.(6-5장 참고)

*뒤러-16세기초의 화가로 세밀한 사실주의를 기반으로 독일 미술을 르네상스 수준으로 끌어올린 독일 미술의 아버지.(8-11장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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