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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렇게 그렸니? 서양미술사

11. 짧고 굵게, 로코코

by 최영철

화폭으로 들어온 애정행각




17세기가 바로크의 시대였다면, 18세기 초-중반은 로코코의 시대로 불린다. 로코코(Rococo)는 '조개무늬 장식'이라는 프랑스어 로카이유(Rocaille)에서 나온 말로, 단어 그대로 조개무늬처럼 올록볼록한 요철 효과의 장식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위키피디아 한국어판'을 보면, "엄밀한 의미에서 로코코는 바로크나 르네상스처럼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조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18세기는 로코코뿐만 아니라 바로크, 고전주의, 낭만주의가 병존했던 시대로, 이 시기에 유행하고 나타난 예술 양식들은 서로 간에 영향을 받고 주는 관계였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하고 있 '양식'이라는 무게감은 다소 떨어지는 느낌이다.


아무튼, 로코코는 프랑스의 절대 권력자 루이 14세 사후, 절대 왕정이 약해지며 프랑스 귀족들로부터 유행한 양식으로 이들은 더 이상 신과 왕의 권위를 찬양하지 않고 자신들의 개인적인 일상과 즐거움, 쾌락 등을 즐기며, 무겁고 진지하지 않은 '쉬운 예술'을 원하는 풍조에서 탄생하였다. 탄생 배경이 이러하다 보니 일부 미술사학자들은 시기의 술이 퇴보했다는 견해 가진 것도 사실이며, 곰브리치 또한 양가적 입장에서 기술하였다.


"로코코라고 알려진 18세기 초의 프랑스 귀족들의 취향을 반영한 것이 되었다. 로코코는 바로크 시대의 호방한 취향을 이어받아 들뜬 경박함 속에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장식의 유행을 말한다."_P 454 / Story of Art


로코코 양식으로 장식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알브레히트의 별장 / 1739년




그러나, 다양성이 강조되는 현대 미술에서는 이런 관점에 대해 균형 잡히지 않은 평가로 간주한다. 그 이유는 약 3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 바로크의 엄숙한 종교·권력 미술에서 벗어나 개인적이고 사적인 정서를 표현한 것이고 둘째, 앙투안 와토, 부셰 등 풍부한 색감, 유려한 곡선, 세련된 분위기로 회화의 감각적 가능성을 확장하였며, 마지막으로 남성 중심의 영웅주의에서 벗어나 사랑, 우정, 자연과의 조화 등 여성성이 강조된 섬세한 주제를 예술의 주류로 끌어올렸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곰브리치는 로코코 미술가 중 주목해야 할 작가 콕 집었으니 "17세기 전반기의 위대한 지도적인 화가들과 비견되는 거장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 거장은 '앙투안 바토'이다."_P 454 / Story of Art


'바토'는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화가들의 영향을 받아 자연의 섬세한 표현 파리로 넘어가서는 루브르 궁의 걸작들을 연구하여 바로크 미술에 자신만의 감성을 담은 로코코 회화의 창시자가 되었다.


카테라섬으로의 출항 by 바토 / 1717년




그의 대표작인 <키테라섬으로의 출항>은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 심사위원들에게 호평을 받아 아카데미 정회원의 자격을 안겨준 작품으로 그 주제가 너무나 인상적이고 참신해 아카데미에서 '페트 갈랑트(Fête galante)=우아한 연예 풍속화'라는 장르를 만들어 주기까지 하였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사건으로 그의 예술적 독창성을 심사위원들이 높게 평가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해를 돕고자 당시 왕립 아카데미 회화 장르의 위계 체계를 소개한다.


프랑스 왕립 아카데미 회화 장르의 위계 체계 - '지적 수준’과 ‘사회적 가치’에 따라 위계화하여, 위와 같은 순서로 평가함.




키테라 섬은 그리스 신화에서 아름다움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를 영접하기 위해 바다에서 솟아난 섬으로, 현재 그리스 반도 최남단에 위치 있다. 당시 ‘키테라 섬에 가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대대로 내려왔기에 많은 연인들이 바다를 건너 섬을 방문해 결혼서약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이에 키테라 섬을 주제로 한 그림들은 전체적으로 자연 속에서 사랑의 서약을 나누는 연인들의 감정, 우아한 복장, 기쁨과 환희가 녹여져 있으며, <키테라섬으로의 출항> 이후 '페트 갈랑트'화의 유행이 시작되어 하나의 장르를 형성하게 된다.


'바토'는 평생을 결핵에 시달리다 36세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그의 그림은 당시 귀족사회의 취향을 가장 잘 나타내었으나 말년으로 갈수록 그의 그림은 점점 가벼운 연애 묘사에서 불안한 내면의 표현으로 옮겨갔다. 광대복을 입은 '피에로 질'은 희극적 인물이지만 표정은 쓸쓸하고 공허하다. 이는 사회에서 웃음을 강요당하지만 내면은 소외된 존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예술가 '바토' 자신의 내면의 고독과 예민한 자아가 투영되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피에로 질 by 바토 / 1719년 경




이런 이유로 '바토'는 단순히 로코코의 화려함을 그린 작가를 넘어 그 화려함 이면에 깔린 인간의 쓸쓸함과 허무함을 가장 섬세하게 표현한 화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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